내 안에 매일 오시는 예수님-(3)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

내 안에 매일 오시는 예수님-(3)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

[ 특집 ] "십자가, 지상 사역의 종착점"

안용성 목사
2015년 12월 15일(화) 16:16

안용성 목사
그루터기교회

지난 두 주간 우리는 이 지면을 통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의 사랑을 묵상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이루신 지상 사역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십자가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대속을 좀 더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셨고, 결국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한 것이다.

누가복음 1장 67~80절에는 세례요한이 탄생했을 때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부른 노래가 기록돼 있다. 여기서 사가랴는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능력 있는 구원자를 일으켜 그의 백성을 돌보아 속량(대속)하신다고 말하는데(67~68절),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언약'(72절)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73절)를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심'으로 나타날 것이다(74절).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대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예수는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을까?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이런 질문들에 답해 보며 주님의 오심을 함께 준비하기로 하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언약'이라는 용어로 서술한다. '언약'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브리트'와 헬라어 '디아테케'는 우리말로 하면 '계약'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이는 쌍방 간에 맺어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 즉 계약도 쌍방적인 것이다.
이 계약에서 '갑'으로서 하나님의 의무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그들의 생사화복을 책임지는 것이다. 반면에 계약상 '을'인 이스라엘의 의무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의무를 뒤집으면 권리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부터 유일신으로 숭배 받을 권리가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 계약은 십계명을 담고 있는 출애굽기 20장에 잘 기술되어 있다. 특히 2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먼저 그분의 계약상 의무를 다하셨다. 출애굽기 1~19장에 잘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분 편에서 먼저 의무를 다하신 후, 계약 상대인 백성에게도 그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십계명으로 대변되는 율법이다.

그런데 이 출애굽 계약의 원형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를 하란에서 불러내시고 장차 태어날 그의 자녀들과 미리 언약을 맺으셨다(창세기 15:12~21).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반복해 계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금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다시 찾아오심이 출애굽기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압제 당하며 고통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를 통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이렇게 출애굽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표현이었다.

바벨론 포로의 귀환 역시 하나님의 다시 찾아오심으로 인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바알을 그리고 강대국들을 섬기며 일방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고, 그 결과는 나라의 멸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다시 그들을 찾아가신다. 이사야는 그 결과로 이루어질 포로 귀환을 '제2의 출애굽'으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보여준다.(이사야 40:3~5, 43:1~3, 48:20~21 등)

하나님께서 인간이 돼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국 십자가를 지신 것은 구약부터 이어진 그 다시 찾아오심의 결정판이다. 마치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430년 만에 그 백성을 다시 찾아가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신바빌로니아―페르샤―헬라―로마로 이어지는 오랜 제국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그의 백성을 사람이 되어 다시 찾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모습이 좀 달랐다. 모세에게 다시 찾아가신 하나님은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고,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다시 찾아가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고국으로 데려오셨는데, 인간 예수가 되어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다시 찾아오심이 갖는 근본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블레셋을 비롯한 수많은 주변 국가들의 등쌀 속에 살아야 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그것은 연속된 제국의 지배 가운데 하나가 끝났을 뿐이었다. 예수는 지배의 더 근본적인 측면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지배가 가지는 영적 성격이다.

페르샤의 멸망은 곧 헬라의 흥기를 의미하고 헬라 지배의 종식은 곧 로마의 새로운 지배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단지 그 지배권을 이스라엘이라는―아니 그 외에 어떤 나라이더라도―한 세상 나라로 옮겨오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변화, 곧 지배 그 자체를 끝내는 일이 일어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대속' 즉, '속량'이란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속량하셨다. 이처럼 대속이란 곧 해방을 의미하는데, 그 해방은 정치적 사회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죽음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는 이렇게 우리를 죄와 죽음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풀어주시고자 했는데, 그 길이 곧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희생이다. 지배로는 지배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 지배에 의해 희생당하는 길을 선택하셨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세력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언약적 신실하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자기를 희생하시까지 그 백성과의 언약에 신실하신 것이다. 곧 다가올 성탄절을 기다리며, 우리도 그와 같이 하나님께 신실하기를 다짐해 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희생적 신실하심을 따라 우리도 그분께 신실한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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