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매일 오시는 예수님-(2)우리와 함께하는 사랑

내 안에 매일 오시는 예수님-(2)우리와 함께하는 사랑

[ 특집 ] "구유에서 생명의 양식이 되셨다"

조동천 목사
2015년 12월 15일(화) 15:57

조동천
신촌교회 목사

인류 역사상 가장 초라하고 더러운 곳에서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그 아기는 짐승들의 오물 냄새가 진동하고, 세균이 득실거리는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났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놓고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구주 그리스도는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에 태어나셨느냐는 말이다.(11절) 이 모든 해답이 다음 구절에 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어떻게 구유에 누인 그 아기가 메시야라는 표적이 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첫째, 구유의 용도를 생각해 보자. 구유는 짐승의 밥 담는 그릇이다. 짐승들은 여기서 허기를 채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짐승같은 우리 죄인들의 밥이 되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요 6: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51절)

이 세상에 누가 자기를 밥이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었는가? 주님은 친히 우리의 밥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하나 되는 임마누엘의 열망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당신과 나의 영이 어디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을 때, 곤고한 우리의 영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셨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구유에 누인 아기로 보여 주신 것이다. 당신은 혹시 겉은 멀쩡해도 영혼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갈증으로 헤매고 있지는 않는가. 구유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예수를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자. 인생의 허전함, 공허함이 견딜 수 없도록 절박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려 오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구유에 우리의 양식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으로 오신 임마누엘의 주님을 받아들이자. 성탄절은 기독교인의 영의 갈증과 굶주림을 채우는 날인 것이다.
둘째, 구유의 가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보자. 실제로 구유를 본 적이 있는가. 시골에서 소의 구유나 돼지의 구유는 음식 찌꺼기를 버리는 더러운 곳이다. 냄새도 영 말이 아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을 그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을 모신 후 구유의 이미지는 영광스런 자리로 바뀌었다. 성화, 영화, 카드에서 메시야로 태어난 아기를 묘사할 때 구유는 항상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광채가 나는 곳으로 바뀌었다. 무대의 중심지, 시선의 초점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거기에 누워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거기, 그 안에 계신다는 것이 이렇게 구유의 위상을 높여 놓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치를 바꾸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이다. 예수님이 삶의 중심에 계시면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니…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우리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임마누엘에 있다. 비록 초라한 사람이지만, 너의 안에 그리고 나의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이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느냐 안계시느냐!' 즉 임마누엘 신앙이다. 예수님이 계시면 구유 같이 냄새나고 하찮은 인간도 새롭게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질그릇이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질그릇에 보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것이다. 송명희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당신과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대우를 받고 있어도 하나님께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이다.

셋째,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제물이 되려고 오셨다는 뜻이다. 즉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짐승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은 거기에서 인생의 첫 날을 보내지 않는다. 그분의 첫 출발은 대단히 상징적 의미가 있다. 왜 짐승처럼 태어나셨을까? 그 이유를 성서의 여러 증인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자 이렇게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이사야 53장 7절에 예언돼 있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 이유를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절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도 속죄의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을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시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다. 멸망의 사자들에게서 생명을 지켜 주었던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양도 바로 이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어린양이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한 존재로 나오고 있다(계 5:9~10, 1:5).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요 5:24) 이처럼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희생의 생축으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로 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속죄 제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것이다. 진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힌 감격보다 더 하얗게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여러분은 구유에 깃든 이런 사랑 고백을 듣고 있는가? 여기에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이 있다. 더러운 마구간, 냄새나는 구유에 오셔서 그곳을 영광스럽고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서 천사들이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신 아기예수를 구주와 그리스도로 소개한 것이다. 속죄의 양으로 오신 이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의 큰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

성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다시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 영적인 기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천하고 더러운 구유를 영광스럽게 하신 임마누엘 신앙으로 낮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섬김의 사역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서로의 죄를 용서하는 진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구유에 깃든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승리하시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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