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10월 5~10일

[가정예배] 10월 5~1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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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30일(수) 10:38

월-루터의 방에서
본문 : 딤후 4:7
찬송 : 585장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군사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을 영적인 싸움으로 말씀하셨다. 이는 구원 받은 후의 삶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죄와의 싸움, 정욕과의 싸움, 마귀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을 싸움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에 속한 죄와 정욕과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린다. 비록 마귀가 성도의 구원을 무효로 할 수는 없어도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대로 살지 못하게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 정욕,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듯이 그 신앙이 날마다 자라야 하고 성숙해야 하고, 진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서 죄와 타협하게 된다.
 
작년에 종교개혁지 답사를 다녀왔다. 종교개혁지 답사 중에 바르트부르크 성에 갔다. 제국회의가 끝난 후에 보쌈 당하듯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옮겨진 후 번역 사역을 감당하고, 영적인 싸움을 계속했던 루터의 방에 들어갔다.
 
루터의 방 직전에 화려했던 왕족과 귀족들의 방을 지나 루터의 방으로 와서인지 루터의 방은 초라해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루터는 책상 하나 놓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영적인 싸움을 외롭게 싸웠다. 거대한 교회 세력과 싸울 때에 얼마나 그가 두렵고 불안했겠는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그는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의 복음을 붙잡고 진리를 바로 세웠고, 교회를 바로 세웠다. 루터인들 그런 힘든 길을 걸어가고 싶었겠는가?
 
그도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쉽고 편한 길을 걷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복음을 깨달은 후에 그는 그럴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복음을 깨달았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거대한 종교 권력과 싸웠고 교회를 새롭게 했다. 오늘 한국교회 안의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나 변질된 복음 등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루터와 같이 비본질적인 것, 비복음적인 것을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뿐 아니라, 세상 사람 보기에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홀로, 외롭게 거대한 종교 세력과 싸웠던 루터의 믿음과 신앙이 부럽다. 루터의 방에서 한국교회와 나 자신의 삶을 보면서 심히 부끄러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았던 루터의 신앙을 오늘 우리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첫 사랑을 회복하여 주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경종 목사
늘푸른교회

화-삶의 두 질서, 아브라함과 롯
본문 : 창 13:1~18
찬송 : 435장

창세기 13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을 좇아 산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삶과 안목의 질서를 좇아 산 롯의 삶을 보게 된다.
첫 번째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아브람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애굽(창 12장)을 떠나 벧엘로 올라왔다. 아브람은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보이는 현실만 추구함으로 빚어진 사고임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벧엘로 올라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예배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과 존경심을 회복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자.


두 번째는, 하나님의 기업을 붙잡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목자들 간에 분쟁이 빈발했다. 아브람은 이미 애굽의 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기로 결단했기에 롯에게 양보했다. 우리의 기업은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이다. 롯은 요단 들녘을 바라보았다. 그 땅은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과 같아 보였다. 결국 롯은 심판의 도시 소돔성까지 흘러 들어갔다.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고 사모한다. 마음과 생각은 입술을 통해 고백되어지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기와 고난의 때에 사건이나 상황보다는 먼저 주님의 약속과 내 마음의 태도를 점검하고 말씀 안에서 바로 설정해야 한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봐야 한다. 롯과 헤어진 후 벧엘에서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5~16)
 
보이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씨가 땅의 티끌같이 되리라고 반복하여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다. 약속이신 그리스도가 나의 기업이요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아직 꿈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속단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주님은 나의 구세주요, 나의 약속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좇아 믿음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철수 목사
풍성한벧엘교회

수-가장 아름다운 만남, 화해
본문 : 창 33:1~4
찬송 : 220장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은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 세리와 죄인, 창녀도 만나셨다. 예수님께 붙여진 별명이 있었는데,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죄인의 친구'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었다.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서 만나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과 함께 돌을 맞을 현장에서 여인을 만나셨다.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과도 만나셨다. 예수님은 죄인을 만나러 오셨다. 이와같이 만남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서로 만날 수 있다.
 
오늘 말씀 속에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만남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형도 동생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엎드렸을 것이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허벅지 다리를 다쳐 다리를 절게 되었고, 그 저는 다리로 20년 만에 만나는 형 에서에게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무릎으로 그 형 에서에 나아간다. 형 에서를 향해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용서해 달라는 애절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야곱의 이 모습을 보고 기세등등한 에서도 야곱을 품에 안아주고 형제간의 뜨거운 만남과 화해가 이루어진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
 
한 날 한 시간에 한 어머니 자궁 속에서 자라서 세상으로 나온 형 에서와 야곱이 다시 만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하나님은 천지 창조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처럼 "참 좋다! 보기 좋구나!" 하시며 덩실 덩실 춤추셨을 것이다. 화해의 만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화해의 사건을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 화해를 위해 무엇이든지 어떤 댓가든지 아낌없이 다 치르시고 내어 놓으시는 하나님!
 
"이 모습이 바로 가정 천국이구나! 이 모습이 믿음의 가정이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시대 조각난 가정에 주시는 말씀이 창세기의 말씀이다. 우리들의 가정이 이런 화해와 용서의 사건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말씀을 성경 맨 처음에 기록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힘 있는 형인 에서가 동생에게 먼저 화해를 청하고 용서를 빌지 않았고, 가해자인 형들에게, 피해자인 요셉이 화해를 청했던 말씀을 전한다. 은혜 받은 사람이 먼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 나이를 초월해서, 가해자, 피해자를 넘어서 먼저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용서 받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용 목사
동대전교회

목-감사의 생활
본문 : 살전 5:18
찬송 : 301장

우리는 '감사함'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감사하다'는 것을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감사한 생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개인적인 이유를 붙인다면 점점 복잡해지는 생존의 환경에서 감사한 생활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감사한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혜이기 때문이다.
 
퀴블러로스라는 정신의학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죽음 직전의 사람을 관찰해서 죽음의 단계를 분류했다. 그런데 필자가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겉과 다르게 퀴블러로스의 죽음의 5단계에서 제2단계인 '분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퀴블러로스가 분류한 죽음의 5단계에서 첫 단계는 '부정과 고립', 두 번째는 '분노', 세 번째는 '타협'이고, 네 번째는 '우울'이며, 다섯 번째는 '수용'이다.
 
필자가 만나본 사람들은 암환자였다. 사실 그분들은 교회의 중직자분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또 한번 놀랐다. 그래서 겉으로는 앵무새같이 "예 감사합니다!"라고 되뇌이지만, 앞으로 병이 낫기까지 고통의 시간과 경제적으로 지불할 현실의 대가가 커서인지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물론 암이 완치되신 분도 만나 보기도 했지만 암이라는 병 자체가 재발의 위험이 높아서인지 더욱더 예민한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암으로 인한 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는 데 있어서 되돌아 볼 수 있는 쉼의 시간을 갖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에서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하다가 생기는 병은 그만큼 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몸은 성전이라 했지만 그것을 가꾸고 지키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역사하신다.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사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알아야만 한다. 
 
일에 파묻혀 살다가 업무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고 암이라는 병에 걸려 죽는다면 그만큼 인생이 허무한 것도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존심이라는 빛을 발하는 꽃은 반드시 떨어져야 열매로 변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한 생활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믿음의 열매로 변하기 위한 '변화'와 '은혜' 받는 시간임을 알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넓은 혜안(慧眼)이 필요한 기간이다.


바라기는 믿음의 백성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며 수용하며, 감사한 생활로서 자기의 인생이 의미 있고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감사하는 생활로 만들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숨어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복용 목사
호산나교회

금-삶의 구석구석에서 누리는 복
본문 : 신 28:1~14
찬송 : 285장

누구든 탁월한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마치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선택받아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탁월한 삶, 탁월한 민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순종이 주는 선물, 축복
본문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수많은 복을 열거한다. 이 복을 받아 누리는 비결은 단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께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켜 행할 때 복은 우리에게 찾아 올 것이다.
 
종에게 중요한 것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듯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누리려면 왕의 다스림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과 형태가 비슷할지라도 그것은 복이 아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다.


복의 근원, 하나님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며 탁월한 민족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원래부터 우월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월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뛰어난 민족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만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축복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스라엘이 배부를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복이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복이 미치는 영역, 모든 삶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삶의 특정 부분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누릴 수 있다고 말해준다.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삶 전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창조의 리듬을 따라 사는 것이고, 일그러지고 왜곡된 세상 질서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내가 복을 누리면 내 이웃에게도 복이 되고, 내 가정과 직장과 교회까지도 복의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늘의 신령한 복이 전달될 것이다. 나를 넘어 너에게로 나아가 네게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게 하는 것, 그것이 선교가 아닐까?


내가 누리고 싶은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시는 복일까? 하나님께 먼저 귀 기울일 때, 우리보다 더 우리 필요를 아시고 더 나은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 구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부터 시작하자.
 
오늘의 기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만 주목하여 살아 뛰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근 목사
대연제일교회

토-예수님과 삭개오(5)
본문 : 눅 19:1~10
찬송 : 310장

예수님과 삭개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등장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여리고와 뽕나무이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고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신 것에서 삭개오의 구원과 회복을 누가는 이미 독자에게 암시해 주었다. 뽕나무는 개역개정판에 돌무화과나무로 개정되었다. 뽕나무(돌무화과나무)는 히브리어로 '갱생, 재활, 복구'의 뜻이 있다. 그 나무로 올라간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나무의 뜻에 부합하는 선물을 주셨다.
 
뽕나무는 건조한 곳에서도 잘 자라며 수명이 길다. 돌무화과나무는 1년에 여러 번 수확한다. 다윗 왕 시절, 돌무화과 목재는 수분과 부패에 견디는 힘이 좋고 가벼워 관을 만들었으며, 가공하기 쉬워 가구, 문짝 등을 만들고 주택의 천장을 덮는 들보로 널리 사용했다.
 
향기라는 의미를 지닌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이라고도 한다. 여리고는 비옥한 탓에 오래전부터 문명의 중심지였다. 겨울철의 여리고는 온화한 기온으로 헤롯왕은 겨울궁과 궁전을 건축하여 겨울에 내려와 거주하였다. 세상에서 최고로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해수면 1300피트 아래 위치한 도시이다.
 
구약의 여리고는 여호수아 2장과 6장에서 신약의 삭개오가 살던 여리고처럼 흥미진진하게 등장하는 성읍이다. 난공불락의 성읍인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얻게 된 최초의 성읍이다. "엿새 동안 매일 한 번씩 여리고성을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되…일곱째 날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돌되, 일곱째 날은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을 나팔을 불고,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들릴 때에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치라"는 것을 순종한 것이다. 
 
뽕나무로 올라간 삭개오도 예수님의 은혜 속에 감격하여 향기를 발하여 구원과 회복을 얻었다. 삭개오는 거룩하고 의로운 무리들 속에 있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 여리고를 취했다.
 
세계에서 가장 최저로 낮은(the lowest) 여리고에서 삭개오는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된 돌무화과나무에 오름으로 자신의 창피함을 예수님께 내어 놓았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예수님의 은혜 속에 빠져 향기 나는 새 생명, 삶을 얻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도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의 삶으로 회복의 은혜 속에 살자. 그래야 향기 나는 그리스도인 삭개오처럼 살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삭개오의 구원과 회복에 참여시켜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영실 목사
명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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