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9월 21~26일

[가정예배] 9월 21~2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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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6일(수) 14:41

월-예수님과 삭개오(3)
본문 : 눅 19:1~10
찬송 : 86장

맛있는 음식냄새가 삭개오의 집에 가득하다. 삭개오가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여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그런데 삭개오의 집 밖에는 사람들이 모여 수군수군 거리고 있다. 왜 수군거리는 것일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의 집에 오셨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삭개오를 헤아려주시고 측은히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 올라가 매달려 있는 중년의 돈 좀 있어 보이는 키가 작은 삭개오를 보셨다. 그 정도 행색이면 호령을 해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예수님을 만났을 법도 한데 그럴 수 없었던지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럴 수 없었던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아셨다. 이유야 어떻튼, 삭개오의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고만 말씀하셨다면, 삭개오가 뽕나무에서 내려와 얼마나 뻘쭘하며 무안했을까 싶다. 예수님은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니,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내려와 그 다음 취할 행동이 있었다. 삭개오는 좋아하며 급히 내려와 즐거이 자신의 집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하였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구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찬을 받았지만 결코 칭찬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리에 세리장인,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몹쓸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싶다. 지금, 자신의 집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데 집 밖에서는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이 흉을 보며 수군거렸다.
 
밖의 사정이야 어떠하던지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대접에 기꺼이 감사하며 즐기고 계신다. 제자들도 그랬다. 어떤 주석가는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몇 일을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 계셨을 것이라고 한다. 삭개오의 대접을 받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 누구하나 삭개오의 허물에 대하여 탓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동네사람들과 달랐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과 양심을 찌르는 말이나, 주눅들만한 언행심사를 전혀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연신 고마워하며 칭찬하시고 삭개오가 대접해 주는 모든 편이를 편안히 즐기셨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계셨다. 이런 예수님의 세심한 헤아림에 언제부터인가 삭개오의 마음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헤아림 속에 빠졌고, 가슴이 뭉클하며, 코끝이 찡한 감동과 감격에 못 이겨 벌떡 일어서서 놀라운 변화의 외침을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이에 응수하여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구원과 분명 칭찬받을 만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셨다.
 
한가위 큰 명절을 앞두고 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곧 만날 친척과 사는 것이 힘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이웃들을 헤아려주는 감사한 명절을 맞이하자.
 
오늘의 기도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사 헤아려 주시고 저희도 삭개오처럼 예수님께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영실 목사
명성교회

화-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라
본문 : 유 1:1~16
찬송 : 341장

주님의 교회는 진리로서 거룩케 함이 마땅하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정결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는 벌레 먹은 사과와 같은 경악할 모습을 보여 왔다. 교회가 거짓 복음과 힘써 싸우지 않고 타협과 왜곡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유다의 도전을 심각히 받아야 한다.
 
거짓 교사의 정체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미혹하는 사람에 대해 유다는 이들이 옛적부터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성도들이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며, 음행과 방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자기만 옳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권위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비방하고 있음을 밝힌다. 유다가 지적하는 모습에 주목해보자. 은혜를 빙자하여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입으로 예수의 주되심을 외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며, 사사로이 접근하여 성경을 푼다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 교사이다. 겉모습은 경건해보이나 성적인 흑심을 드러내거나 함부로 비방하고 자만에 빠져 있다면 거짓 교사이다. 이럴 땐 인정에 매이지 말고 객관적인 판단으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거짓 교사가 받을 심판
 
다시금 거짓 교사를 경고하기 위해 유다는 과거 심판의 전례들을 언급한다. 출애굽의 심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교만했던 천사들을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던 심판, 광란한 음행을 행하다 초토화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 우리가 인간적인 관계에 경도되어 무분별하게 불의의 편에 서거나 탐욕에 사로잡혀 성공과 번영의 거짓 복음을 지지하거나 은혜를 빙자하여 죄에 참여한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거짓 교사가 가는 길
 
거짓과 불의의 길을 가는 이들은 미움과 질투의 화신인 가인의 길을 가는 자이며, 삯을 위하여 불법을 택한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가는 자이며, 분수를 모르고 시기와 과욕 속에 아론의 지위를 탐한 고라의 패역한 길을 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성도의 교제를 좌초시키는 암초와 같다. 이런 이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며 욕심대로 살아간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상실한 이들을 위해 예비된 것은 심판뿐이다. 복음 진리를 따르는 삶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자기부정의 길이다. 거짓 복음을 따르는 길은 넓고 큰 길, 자기 영광의 길, 쉽고 편한 길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믿음의 도를 위한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한다.
 
오늘의 기도
 
거짓 교사가 받을 심판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근 목사
대연제일교회

수-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에녹
본문 : 창 5:21~24
찬송 : 430장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에녹에 대한 말씀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다. 에녹이란 뜻은 '가르치다', '시작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에녹은 그의 이름대로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되고 교훈이 된다.
 
첫번째로, 에녹는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에녹을 통해서 사람과 교제하며 동행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 그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사울이나 솔로몬의 경우를 보면 시작은 아름다웠으나 끝이 좋지 못했다. 그에 반해 에녹의 생애는 일생 아름답고 존귀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다.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소원과 같은 목적을 갖고 살았다. 우리는 경건하게 사는 것이 가정을 떠나고, 부부생활을 떠나고, 직장을 떠나서 고고하게 산에 들어가 사는 것이 경건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았던 에녹은 자식을 낳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두번째로, 동행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지 않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려면 자신의 기준을 낮추어 에녹에게 모든 기준을 맞춰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고 모든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었다는 말이다. '칭의'가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셔서 나를 배려해주신 것이라면 '성화'는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살기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 살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춘 삶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다. 하루의 시작을 감사기도로 시작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사는 생활이다.
 
오늘의 기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철수 목사
풍성한벧엘교회

목-"싸다 싸다 천원, 천원"
본문 : 눅 9:36
찬송 : 451장

베드로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열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급한 성격과 덤벙거림으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기도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문제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베드로와 두 제자는 졸다가 깨어나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다. 여기에 초막 세 개를 만들고 이곳에서 지내십시다. 누가는 베드로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한다. 그가 깨어 있어야 할 때에 졸다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단지 졸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께 그렇게 말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베드로가 바라봐야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는 이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만 보이더라"는 말로 정리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베드로는 주님에게만 집중해야 했고,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봐야 했는데 그것보다 영광을 바라봤고, 때에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삶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보다는 세상의 영광, 나의 자랑, 나의 욕심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일전에 성지순례 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한 걸음씩 걸어갔다. 그런데 수많은 순례객들로 인한 소음과 그곳에서 장사하는 아랍 상인들로 인해 경건한 마음으로 묵상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아는 그들은 한국말로 연발 "싸다, 싸다, 천원, 천원"을 외치면서 호객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호객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길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걷기보다는 그들이 파는 허접한 물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판매하는 것을 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정작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인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처럼,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아닌 다른 것에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빼앗긴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경종 목사
늘푸른교회

금-믿음의 가정 이야기(3)

본문 : 창 27:30~40
찬송 : 410장

현대 많은 가정이 서로 갈등하고 그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화와 소통이 부재하여 결국 부부 문제가 극대화 되면서 이혼의 파국으로, 심지어는 가족 동반 자살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가정의 평화는 이 시대의 과제이면서 동시에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를 이루는데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창세기의 믿음의 가정에 대한 말씀은 가정의 화목의 키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대전제를 먼저 말하자면 "믿음의 가정은 불화한 가정에서 평화한 가정으로 변화된 가정"이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이삭의 가정은 겉으로는 축복의 가정으로 보이나 실상은 분노가 가득한 가정으로 보인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한 형제간의 경쟁이 시작된다.
 
형 에서는 당연히 장자인 자신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 채 사냥을 나간다. 형 에서가 사냥에 나가 집에 없는 동안에 형을 가장한 야곱은 미리 준비한 대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 나간 뒤에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갔다가 약삭 빠른 동생 야곱이 먼저 다녀간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로부터 동생이 받은 축복의 이야기를 듣고 형 에서의 반응은 어땠는가?
 
"에서가 울며 아버지에게 그가 나를 속임이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형은 그 사실에 대해 울면서 분노하고 있다. 이것이 믿음의 가정에서 벌어진 실제상황이다.
 
분노의 감정은 미움을 낳게 되고 그 미움은 동생을 죽이고 싶은 살인의 감정까지 낳는다. 형 에서의 분노로 가정은 매 순간 불안하고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믿음의 가정 이삭의 집안 분위기는 불안 초조 분노 두려움 긴장감으로 매일 매일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가정과 많이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38절을 보면 "에서가 아버지에게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말한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축복기도 한다.
 
믿음의 가정은 축복의 가정이다. 그 축복이 야곱의 축복이든지 에서의 축복이든지 축복은 축복이다. 만약에 야곱의 축복을 에서가 받고 에서의 축복을 야곱이 받지 않았다면 괜찮았을까? 아니다. 야곱의 마음에 있는 불안감, 에서의 마음에 있는 분노가 변하여 평화의 마음으로 바뀌지 않는 한 축복이 진정으로 축복이 아니다. 축복을 잃어버린 가정마다 평화의 축복을 누리시길 간구한다.
 
오늘의 기도
 
주여, 우리 가정에 경쟁이 아니라 분노가 아니라 불안감과 초조함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의 축복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용 목사
동대전교회

토-위로의 말 한 마디

본문 : 잠 25:11
찬송 : 299장

미ㆍ고ㆍ사ㆍ축(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위로의 말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고백이 되기도 한다. 말이란 본래 혼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와 다른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중요한 삶의 수단이다. 지혜서인 잠언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고 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고 가치 있는 말과 시기적절한 말은 인간관계를 복되게 할 것이다.
 
사람이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남자가 약 2만 5000~3만이다. 과연 얼마나 필요 적절한 위로의 말을 하고 사는 지 생각하게 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그리스의 우화 작가인 이솝은 기원전 6세기경 사모스에서 철학자 쿠잔토스의 노예로 있었다고 한다. 그는 총명함과 지혜가 뛰어나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던 중 하루는 주인이 이솝의 슬기로움을 시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좋은 것이 무엇이냐?" 이솝은 대답하기를 '사람의 혀'라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혀는 진리와 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다시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이솝이 대답하기를 "사람의 혀"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혀는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기관이 되기 때문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름다운 말이다. 은쟁반에 놓은 금 사과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말은 누가 듣던지 기분이 상쾌한 것이 마치 아름다운 풍경이나 물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좋은 말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말을 귀중히 여기게 된다. 가정에서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축복해요'라는 위로의 말이 사용된다면 더 한층 밝은 삶이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노라면 언어생활은 긍정적일 것이다. 또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면 그 말이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복스러운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에머슨은 "다정스런 말, 조용한 말은 결국 가장 힘있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오늘의 기도
 
나의 입술을 주장하시어서 늘 위로의 말이 습관화 되게 하시고 은쟁반에 금 사과 같은 말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복용 목사
호산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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