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9월 14~19일

[가정예배] 9월 14~19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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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09일(수) 09:49

월-낙타에게 배운 교훈
본문 : 벧전 5:7
찬송 : 382장

신문이나 잡지를 스크랩하다보면 많은 글들이 행복에 관한 것들임을 보게 된다. 사람마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한다. 행복해지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지만 대개 그 내용은 비슷하다. '삶에 만족하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 감사하라'는 것들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행복에의 비결에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염려를 내려놓는 것이다. 아무리 삶에 만족하고, 감사한다고 해도 걱정, 근심으로 가득한 삶이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은 모든 염려를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진정한 행복은 삶에 모든 염려, 근심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염려, 근심, 걱정, 문제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인생은 염려, 근심, 걱정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지, 그것들이 없이 사는 삶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성도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맡기라'는 단어의 원어의 의미는 던져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염려를 맡긴다'는 말은 의식적, 의도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 말 속엔 걱정, 근심, 염려를 던져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은 계속 우리의 삶에 들러 붙는다는 것이다. 근심, 걱정들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내 속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던져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염려를 던져버려야 할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염려를 던져버려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근심, 걱정 없이 살 인생이 누가 있겠냐마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뢰할 만한 하나님께 던져버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과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일전에 성지순례에 참가해 낙타를 타고 시내산에 오른 적이 있다. 깜깜한 밤에 낙타가 길 바깥쪽으로 걷는데 혹시 낙타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몹시 불안했다. 낙타의 키 높이에다 2~3m정도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심한 부상을 당할 것 같아 계속 길 안쪽으로 몸을 틀어도 낙타는 계속 길 바깥으로 걸어갔다. 나의 걱정을 비웃는 듯 낙타는 나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줬다. 밤눈이 밝은 낙타였기에, 또 그 길을 수없이 다녔던 낙타였기에 아무 사고 없이 목적지까지 갔던 기억이 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미물인 낙타조차도 나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태우고 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인가? 오늘 하루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보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복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경종 목사
늘푸른교회

화-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본문 : 창 4:1~7
찬송 : 384장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내용이 나온다. 가인은 땅의 소산(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문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과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던 제사장의 삶의 차이였다. 가인은 자신을 위하여 농사를 지었고(직역하면 땅을 섬기는 자), 아벨(허무, 공허)은 하나님을 위하여 양을 치는 자였다. 홍수 전에는 오직 식물만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창 1:29)." 노와 홍수 이후에야 육식이 허용되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그러니까 아벨이 양을 치는 자였다는 말은 양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벨은 하나님을 위해서 제사용 양을 길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제사장 직업을 갖고 살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가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았던 자(者)요, 땅의 것을 위해 충족을 채우고, 땅을 섬기는 자로 살았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살았던 자(者)이다. 지금도 우리는 양을 치는 제사장과 자신을 위하여 사는 가인의 후손들을 본다. 돈을 벌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버는 자가 있고, 자신을 섬기기 위해서 돈을 버는 자가 있다. 아벨처럼 공부를 해도, 돈을 벌어도, 직장 생활을 해도, 사업을 해도 주님을 위해서 하는 사람은 제사장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가인은 피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레위기 원칙을 따르면 피없는 제사 즉, 곡물로 드리는 소제의 제사는 반드시 먼저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린 후에야 소제를 드릴 수 있다. 가인은 하나님의 대속의 구원의 방법을 무시하고 피 없는 제사를 드렸다. 사탄은 우리가 피 없는 제사를 드리도록 유도한다. 예수님 없는 종교, 십자가 없는 종교 행위, 회개 없는 예배, 죄에 대한 각성이 없이 돌이키지 않는 마음은 사탄의 전술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제사(예배)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가인처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아벨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내가 아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없는 행위로 인해 가식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철수 목사
풍성한벧엘교회

수-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본문 : 골 3:22~24
찬송 : 338장

본문의 핵심은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종의 신분에게 주는 말씀에서 먼저 교훈을 받아야만 한다. 첫째, 진실한 섬김으로 주께 하듯해야 한다. 종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 '섬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섬김이다. '왜 내가 종인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문제이다. 처음부터 자유자요, 주인인 자는 평생토록 섬김을 알 수도 배울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섬김에서 출발한다. 자발적 섬김인 것이다. 종의 축복은 딱 한가지이다. 바로 '섬김'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순종할 종으로 두지 않으셨다. 당신이 친히 종의 모습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다. 섬김으로 이제 이 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둘째,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 사람을 보면 정직과 성실은 항상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주님께 하는 자세이어야 한다. '이것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것을 잊지 않으리라." 나와 관계된 사람을 주님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행한 행실을 주님이 받으신다. 학생이 공부를 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주의 일이 된다. 직장 업무를 주께 하듯 하면, 그 일을 통해 얻은 소득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주의 일이 되는 것이다. 가정주부가 가사 일을 주께 하듯 하면 그 일도 주님의 일이 된다.
 
셋째, 주님께 하듯 하는 사람은 하늘에 상급을 얻는다. 섬기는 자는 이땅에서 영광을 기대하지 않는다. 믿음은 하늘나라까지 연장되어야 한다. 봄에 씨를 뿌렸으면 가을에 추수하듯 신앙인에게 봄과 여름은 이 땅에서의 수고의 계절이고, 가을의 추수와 겨울의 쉼은 하늘나라의 계절이다.
 
여기에서는 수고만 생각해야 한다. 열매까지 거두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냥 인간이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이땅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취할 것은 아니다. 골로새서 3장 18절에서 "아내들아…", 19절 "남편들아…" 20절 "자녀들아…" 21절 "아비들아…" 22절 "종들아…"라고 나열한 것은 '모든 사람들아 너희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의 기도
 
섬기는 자로 살며 하늘의 신령한 상을 소유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복용 목사
호산나교회

목-믿음의 가정 이야기(2)
본문 : 창 27:5~29
찬송 : 549장

팽팽한 긴장 관계에서도 남북한이 대화를 시도했고, 장시간 대화로 합의점을 찾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도저히 대화가 힘들 것만 같았던 남과 북인데, 그래도 대화를 시도했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떤가? 서로를 진정한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가? 가족 간의 대화를 잃어버린지 얼마나 되었는가?
 
오늘 본문은 '정말로 부부간의 대화가 있었는가?'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창세기 25장 23절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쌍둥이를 임신한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던 리브가는 남편 이삭과 대화하지 않은 듯 일을 꾸민다. 이삭을 속여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탄로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야곱에게 리브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이 일을 꾸미기 전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의 입장을 의논하고 상의했을까? 미루어 짐작컨데 둘은 대화가 막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삭은 '당연히 장자인 에서가 축복을 받는 것'이라 여겼고,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이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작극을 꾸몄다.
 
야곱의 거짓말은 엄마 리브가의 작품이다.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바램대로 아버지 축복을 받아낸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3절)"라고 했다. 이삭은 자신의 손의 감각으로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이삭은 단순히 눈이 어두워진 것만이 아니었다. 리브가의 임신 때에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도 잊어버린듯 하다. 믿음의 가정은 진리를 따르는 가정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사실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감각도 진리가 아니고 보는 것도 진리가 아니다. 이삭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분별력을 잃어버렸기에 더 확인하지 않고 야곱에게 축복 기도한다. 믿음의 가정은 서로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가는 가정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이삭과 리브가가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작극으로 인해 생긴 갈등과 아픔이 용서와 화해로 가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됐다.
 
야곱의 축복을 기대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가족간의 대화의 축복과 분별해 나가는 바른 결정의 축복이 있어야 한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가족 간의 대화를 시도해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가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시길 간절히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이삭과 리브가처럼 가족 간의 막힌 대화의 문을 열어주소서! 하나님과 대화기도를 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용 목사
동대전교회

금-모든 자를 위한 복음
본문 : 딤전 2:1~7
찬송 : 536장

죄의 특징이자,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차별'이다. 차별하고 또 차별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세상 문화를 거슬러 모든 사람이 함께 공평하고 평등하게 유익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창조주를 인정하면서 하늘의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 바울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열망에 기도로 참여하라고 권면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종류의 기도를 열거한다. 기도와 도고와 감사와 간구. 이런 종류의 기도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부탁한다. 심지어 로마황제를 포함하여 신앙을 박해하는 자들도, 그래서 원수 삼아 마땅한 자들까지도 위하여 기도할 대상이라고 하신다. 사실 바울도 이전에 그들의 하수인이었는데 구원받았으니, 그들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황제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다. 그것을 모르는 그들이 불쌍한 자들이니, 그것을 아는 우리가 먼저 기도해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중보자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몇 사람만을 위해서라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 한 분의 중보자로 보내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셨다. 아무도 처음부터 차별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거절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구원의 길을 만들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할 뿐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민족도, 계층도, 성도, 지역도 없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고,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직
 
바울은 자신의 정체를 이방인의 스승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방인은 언약의 외인이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는 그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가야 한다.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다. 자격이 없다고 여기던 유대인들은 반대하였고, 자신도 과거에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사도가 되었다. 그 '모든 사람'을 향한 복음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갖은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모든 사람'인가?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나라만 챙기는 것은 아닌가?
 
오늘의 기도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오늘 차별하지 않는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근 목사
대연제일교회

토-예수님과 삭개오(2)
본문 : 눅 19:1~10
찬송 : 83장

여리고로 들어오신 예수님이 뽕나무에 매달려 있는 삭개오를 보시게 되었고, 예수님의 청함에 삭개오가 흔쾌히 응하여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삭개오에게 내려졌다.
 
같은 시각에 삭개오의 집 문밖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며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는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기에 앞서 한 맹인을 만나고 그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 그 맹인은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란 이름을 듣고는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큰 소리로 외쳐 예수님을 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큰 소리로 거듭 예수님을 불렀다. 몹시 다급했다. 그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그는 예수님을 뵙게 되었다. 맹인은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하시고 보게 하셨다. 삭개오의 집 앞에 있는 여리고 사람들이 언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놀라운 맹인의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고 계신 것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메고 있는 멍에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들의 멍에를 내려줄지 알지 못했다. 예수님과 자신이 직접 만나야 할 것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꾸짖고, 비난하고, 불평할 줄만 알았다.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니, 예수님도 죄인인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심지어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조차도 무시하며 불만불신을 토로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게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다. 여리고 사람들은 맹인과 삭개오의 티는 보고, 자신들의 들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 타인에게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투덜대며 불평불만만 늘어놓느라 자신들의 무거운 멍에를 예수님께 내려놓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고마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르지 않았다.
 
오늘의 기도
 
주님! 삭개오처럼 예수님께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영실 목사
명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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