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9월 7~12일

[가정예배] 9월 7~12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9월 01일(화) 14:41

월-복음의 결실로 승리한 자
본문 : 고전 9:24~27
찬송 : 289장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운동경기를 실례로 들어 교훈을 주고 있다.
 
당시 고린도 시는 2년마다 열리는 '이스미안 운동 경기'의 중심지였다. 이스미안 운동경기가 개최될 무렵에는 고린도 시가지와 언덕마다 이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훈련하는 선수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 고된 훈련에도 최선을 다하고 자기 절제에 힘쓰며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의의 면류관이다. 우리들은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 신앙 승리의 방해거리가 되는 죄악을 피해야 한다. 신앙 승리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열정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할 때나 뜨거운 믿음의 삶을 통해 결실을 맺으며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야 한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을 절제하고 훈련해야 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모든 경기와 경주는 경쟁이다. 승리를 위하여 경쟁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절제'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였다. 그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 절제해야 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연약한 형제들을 시험 들게 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절제와 훈련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셋째,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경주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여기서 '향방 없이(아델로스)'라는 말은 '목표가 없는', 또는 '목표가 불분명한'이란 뜻이다. 달음질하는 사람이 그 방향과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고 경주에 임하듯이 승리의 삶을 살려면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직 예수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살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달음질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닮는 목표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복용 목사
호산나교회

화-에덴동산의 축복
본문 : 창 1:18~25
찬송 : 408장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 천국을 매일 살기 위해서 5가지 영적 원리를 기억하며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 안식일 제도는 은혜의 원리이다(창 2:1~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위한 모든 필요를 그의 창조 속에 준비하셨다. 인간은 창조되자마자 바로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것을 누림으로 인간의 삶이 출발한다. 구원도 창조의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키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안된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다(창 2:4~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의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생기를 모시고 사는 성전으로 창조되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우리는 늘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세 번째, 사람이 먹어야 할 양식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나무이다(창 2:8~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우리는 생명의 떡이며, 음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 공급받아야 한다. 이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생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다.
 
네 번째, 선악과는 하나님과 사람의 구분선이다. 선악을 알고, 판단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아니다. 마지막 판단과 심판권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살리고, 치료하고, 세우는 일만 해야 한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다.
 
다섯 번째, 부부는 돕는 배필로 세우셨다(창 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부부는 서로 돕고 섬기라고 세우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섬기고 내조할 돕는 배필을 찾고 계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지체이다. 우리는 몸의 지체로서 몸인 주님을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음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천국을 사는 에덴동산의 영으로 매일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철수 목사
풍성한벧엘교회

수-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 : 시 1:1~6
찬송 : 28장

단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그 단어를 통해 사상을 정리하는 출발점이다. '믿음','의','사랑','천국' 등 매우 중요한 성경의 개념은 그 안에 엄청난 사상을 담고 있는 소우주와 같다. 따라서 그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에 따라 사상을 어떻게 전개할지 큰 영향을 미친다. '복'도 그와 같은 단어이다. 복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럼 진정한 복은 어떻게 얻으며 어떻게 누리는가?
 
말씀묵상에서 온다. 복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자에게 임한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지 말씀을 배우거나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이 참된 복의 근원이심을 신뢰하여 그분의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생각을 바꾸고 손발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럴 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을 수 있다. 중립지대란 없다. 죄인과 의인, 복 있는 자와 악인 사이에 우리가 걸쳐 있을 곳은 없다. 복 없는 자는 악인이요, 죄인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가 복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온갖 특권이 복이다. 그러니 그 나라 백성으로 살고 싶지 않은데 복은 누리고 싶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이 주는 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통함으로 온다. 복 있는 자는 철 따라 열매를 맺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 반면에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깊이 뿌리를 내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시냇가 옆에 든든히 서 있는 나무와 잔바람에도 온 데 간 데 없이 날아가는 겨,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린 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을 따라 주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덧입고 사는 인생과 중심 없이 시류에 휩쓸리는 가여운 인생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은유이다. 이것이 복 있는 자와 악인의 비교할 수 없는 결과이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둘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이고, 심지어 악인이 의인보다 더 형통하고 더 많은 복을 누리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그래서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가게 하신다. 진정한 복은 이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하늘의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나는 복 있는 자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복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관계에서 나오는 풍성함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근 목사
대연제일교회

목-예수님과 삭개오
본문 : 눅 19:1~10
찬송 : 85장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의 대한 소문이 여리고 사람들에게 퍼졌다. 소문의 내용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능력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신다는 것이었다. 여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예수님을 둘러쌌다.
 
여리고에는 키 작은 세리장(세무서장) 삭개오가 살고 있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지 못했다. 로마제국의 속주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삭개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빈틈을 찾지 못해 예수님의 무리가 지나가실 길목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다. 
 
잠시 후, 예수님의 무리는 뽕나무 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이 지긋한 양반네 옷을 입은 중년 남자, 삭개오를 보았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가 얼른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여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을 할 때 집 밖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삭개오가 세리장으로 동족의 혈세를 빨아먹는 매국노, 수전노인데 예수님은 삭개오가 누군지 모르신단 말인가?"
 
그러나 삭개오는 동네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였다. 흉내만 내는 겉만 번지르한 대접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삭개오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는 중 그답지 않은 행동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세리장 삭개오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예수님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의 기준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셨다. 예수님이 죄인을 찾으셨는데 그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다. 삭개오는 자신이 죄인인줄 알고 있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죄인들은 정죄나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과 구원의 대상이다.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찾아 구원을 주시고 자유를 선언해 주신다. 이것은 매우 감동적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여 벌 주기 보다는 용서하시기를 즐거워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찾으신다. 삭개오처럼 바로 나를 말이다.
 
오늘의 기도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영실 목사
명성교회

금-국왕께서 근심하십니다
본문 : 삼하 15:10~11
찬송 : 325장

가끔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때가 있다. 지난 과거의 실패와 잘못이 부끄럽기에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때가 있다. 실패한 과거를 후회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지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하나님도 후회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한다. 본문의 '후회'라는 말을 영어 성경은 'grieve'라는 말로 번역했다. 그리브(grieve)는 '슬퍼한다'는 의미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을 후회하실 수 없기에 후회라는 의미보다는 슬퍼한다는 의미가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에 대해 슬퍼하셨다. 하나님만 사울로 인해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기름 부은 사무엘도 사울로 인해 밤새 근심하고 슬퍼했다.
 
사울은 왕으로 선택받을 때만 해도 겸손했다. 그는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성령님의 은혜도 체험했다. 그랬던 그가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슬픔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과거의 실패를 회복할 기회를 주셨는데 그는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자신의 욕심과 만족을 위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사울만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가? 하나님도 우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시어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슬픔과 걱정의 대상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로 인해 슬퍼하고, 근심하시지는 않는가? 필자가 태국에 여행 갔을 때에 들은 얘기다. 나라에 문제가 있을 때에, 정치가 혼란스러울 때에 국왕이 걱정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치인들은 정쟁을 멈추고 국왕이 근심하지 않도록 힘쓴다고 한다. 여야 간의 입장차가 있어도 국왕께서 심히 근심하신다는 보도가 나오면 정치인들은 갈등과 분열을 그친다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모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거나 근심케 하는 자들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들로 인해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가 생기도록, 우리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첫 사랑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로 인해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경종 목사
늘푸른교회

토-믿음의 가정 이야기1
본문 : 창 27:1~4
찬송 : 560장

가을은 우리들을 자연과 농어촌으로, 집으로, 고향으로 향하게 하는 계절로 느껴진다. 9월에 추석이 있기 때문일까? 구약 성경 가운데 창세기에서는 가정의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정, 이삭의 가정, 야곱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다.
 
믿음의 가정은 어떠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가? 믿음의 가정은 주님 안에서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시험이 들 수 있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고 하지 말고 성경 말씀 그대로 볼 수 있기를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먼저 드리고 성경 말씀을 보시면 좋겠다. 성령님! 우리에게 빛을 비추사 성경 말씀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보게 하소서!
 
창세기 27장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두 아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으로 보여진다. 27장 1절에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 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두 아들을 부르지 않고 맏아들만 불러 축복하려고 한다. 그 당시 풍습에 따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대의 통념은 진리일까? 그 시대의 문화는 진리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의 가정은 진리를 따르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그 시대의 문화나 통념을 따르는 가정은 믿음의 가정으로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삭의 가정은 가장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시작한 것이 결국은 둘째 아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아버지의 축복이 형제간의 갈등으로 두고 두고 남아 있게 된다. 이 사건은 성경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만일 나에게 자녀가 둘 있는데, "큰 아들에게 너만 축복해 줄테니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와라!"고 말한 것을 둘째가 듣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현대의 가정에선 아마도 둘째가 아빠를 찾아가 따졌을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간의 작은 갈등이 생겼을 것이다. 오늘 이삭의 가정이 믿음의 가정으로 변화되는 길은 어떻게 하는 길일까? 지금 우리의 가정이 믿음의 가정으로 변화되는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그 길은 시대의 통념과 문화를 따르지 말고, 진리를 따르는 가정, 말씀을 따르는 가정이 되어 가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변하는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통념에서 진리를 따르는 가정, 말씀을 따르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용 목사
동대전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