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8월 17~22일

[가정예배] 8월 17~2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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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17일(월) 16:18

월-복 씨앗을 심는 인생
본문 : 갈 6:7~8
찬송 : 28장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 화장실에서 이런 문구를 보았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의미있는 호소이다. 내게 가장 의미있게 느껴졌던 화장실 문구가 무엇인가? 필자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다 간 곳도 아름답습니다"이다.
 
사람은 짧은 머묾이지만 무엇인가를 남기고 간다. 인격이 아름다운 사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간다. 인격이 마음이 병든 사람은 나쁜 흔적을 남기고 간다.
 
우리 스스로에게 매 순간 질문해야 한다. 내가 지난 한 주간 머물던 삶의 현장에 무엇을 남겼나? 또한 가정과 가문에도 무엇인가를 남기게 된다. 내가 심은 것은 자녀에게 반드시 영향을 끼친다. '메릴린 하키'가 지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이 있다.
 
성경 말씀에는 동전의 양면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 즉 부모가 범죄하면 자손의 3, 4대가 죗값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런즉 너는 알라…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모가 복의 씨앗을 심으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상담으로 시작하고 있다. 어느 날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는 한 젊은 여성과 상담했다. 그녀는 이미 두번을 이혼한 경험이 있으며 세 딸을 두고 있었다. "자매님은 알고 계십니까? 딸들이 자라서 결혼하게 되고, 3번씩 이혼하게 되고, 자매님 마음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자매님의 어머니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적인 죄의 저주 아래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매님의 어머니도 3번 이혼하고, 난잡한 이성관계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매님도 어머니처럼 3번 이혼하고 똑같은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자매님이 이혼하면 앞으로 자매님의 어린 딸들도 3번 이상 이혼하며, 난잡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을 고통 가운데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 이혼 씨앗이 심어졌나? 여성 상담자의 어머니로부터 심어졌다. 한 사람 잘못으로 어떤 씨앗이 심어지면 그 때부터 그 가계에서는 같은 내용을 결실한다. 잘못된 것을 심으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부모가 복의 씨앗을 심으면 자녀들이 복된 열매를 거두게 된다.
 
다윗은 목숨 바치는 심정으로 성전을 지어 봉헌하려 하였고, 주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말씀을 마음에 두는 신앙을 가지니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가 심은 것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오늘의 기도
 
주여, 심은대로 거둔다는 간단한 진리를 늘 새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재운 목사
인동동부교회

화-열정의 온도
본문 : 눅 19:1~10
찬송 : 412장

상처를 입은 어린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기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영웅 독수리가 내려왔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독수리가 말했다. "나는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아?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 친 상흔이 나타났다. "이건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은 새들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정채봉의 '모래알 한 가운데' 중에서)
 
우리는 겉으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독수리들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삭개오도 그러했다. 로마의 세리장이었고 경제와 권력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그의 내면의 고통은 컸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그날 밤 삭개오의 집에 유하셨고 삭개오는 회개하며 복음을 받아들이고 옳은 삶을 살 것을 약속했다. 그의 삶은 확실히 달라졌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온 것일까?
 
첫째, 예수님과의 만남을 열망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나무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수군거리는 이웃을 생각하면 도저히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한계를 이기게 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열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쳐다만 보고 마음만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희생의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올라가야 한다.
 
둘째, 예수님이 만나 주셨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밑에서 위를 "쳐다보시고"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오늘 네 집에 유해야겠다." 이것은 최고의 인정이었다. 예수님은 열정으로 올라오는 자를 만나신다.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낼꼬?" 물으실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구령의 열정 있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역사는 열정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내 상처가 더 크다고 고통하며 낙심하고 있다면 열정의 온도를 체크하고 첫사랑을 회복하는 여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상처 때문에 주저앉아 있는 모든 이에게 열정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도숙 목사
동산교회

수-이슬과 함께
본문 : 출 16:4~6
찬송 : 96장

약속의 땅을 향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애굽을 떠날 때 갖고온 양식이 고갈되었고, 그로 인해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한다. 애굽의 음식을 갈망하며 옛 방식대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에게 새로운 음식을 주어 그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온 음식으로 그들을 먹이셔서 하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 땅에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인 '만나'였다. 그 만나는 하늘로부터 왔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하늘양식인 만나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떡'(요 6:51)이시며 우리의 양식이 되기 위해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떡'(요 6:32-33)이다.


하늘에서 온 떡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게 하는 양식인 것이다. 만나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유지시켰던 것처럼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런데 만나는 이슬과 함께 온다.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민 11:9, 출16:13~14) 만나가 이슬과 함께 왔다는 것은 영적의미를 갖는데 매일의 은혜, 우리가 매일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미한다. 주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아침마다 새롭다. 만나는 항상 은혜의 수단으로 온다. 이슬을 체험할 때 언제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위로부터 우리 안에 오신다.
 
또한 만나는 아침에 보내졌다. "아침마다 그것을 거두었더라." 만나가 아침에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준다는 것이다. 만나로 인해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만나 되시는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아침에 말씀을 읽을 때 이슬을 맞는다면 말씀이 양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새롭게 적시는 은혜를 체험할 때 하늘에 속한 생명 공급이신 예수님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구속받기 전 우리는 애굽의 음식을 먹었지만 구원 받은 후 우리는 우리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음식으로 채우시고 하늘의 신비와 감격을 경험하게 하신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음식인 만나를 누릴수록 더욱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되어갈 것이다.
 
우리의 기도
 
이슬과 함께 만나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침마다 주님을 만나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봉재 목사
연곡소망교회

목-환상의 오아시스
본문 : 출 15:22~27
찬송 : 402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후 그들을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들이 수장되고 극적으로 구원 받았다. 그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구원을 노래하며 얼마나 감격했었는가?
 
이렇게 한량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수르 광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곳은 삭막하고 메마른 사막 길로 접어들었다. 홍해의 기적과 은혜를 이미 경험했기에 서로 힘을 내자고 격려하면서 참고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만난 것이 마라의 쓴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쓴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쓴물이 아닌 오염되고 썩어서 마실 수 없는 물을 말한 것이다. 물이 있어도 마실 수 없으니 얼마나 실망이 컸겠는가?
 
그리하여 그곳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다. '고통'이란 뜻이다. 마라의 고통은 희망이 꺾어지고 기대가 무너진 것 같은 고통이었다. 요즘 시대에 희망이 없다고들 말한다. 이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첫째, 쓴물을 달물로 바꾸어 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이 가리키신 나뭇가지를 꺾어서 쓴물에 던졌더니 단물이 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인생가운데에서 마라의 쓴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쓴물을 단물로 바꿔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쓴물을 만날 때가 있다. 기대감이 무너지고 소망이 끊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단물 같은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다. 요셉이나 혈루증 여인 등과 같이 소망이 없고 절망가운데 있었던 자들이 주님을 만남으로 살맛나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두 번째 마라의 쓴물을 단물 되게 하신 하나님은 엘림의 오아시스로 인도하셨다.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하룻길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다. 사막에서는 샘 하나 찾는 것도 귀한데,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라에서 조금 더 갔더니 환상의 오아시스인 엘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림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엘림은 우리 가까이 있다. 하나님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목자가 되어 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엘림을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놀라운 인생의 오아시스를 향하여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라의 쓴물을 만나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말자. 원망불평하지 말자. 나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반드시 쓴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시고 환상의 오아시스 엘림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마라와 같은 쓴물을 만나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엘림의 소망을 갖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만호 목사
이루리교회

금-포기와 끈기
본문 : 마 15:21~29
찬송 : 347장

신약성경에 주님을 두 손 들게 만든 여자가 있는데 바로 가나안 여자이다. 주님은 그 여인의 간청을 두 세번 냉정히 거절했으나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며 여인에게 항복하셨다. 이 여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끈기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와같이 주님도 우리를 시험하실 때가 있다. 마태복음 8장에 한 백부장의 간구는 즉시 허락하셨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의 간청에는 왜 이토록 매몰차게 무참히 거절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과연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겉으로 보면 이방여자라고 거절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만 예수님은 결코 인종차별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예수님은 대꾸조차 없이 냉정히 거절하셨다. 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두 번 거절하셨다. 그리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시며 3번째 단호히 모욕적으로 거절하셨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도 시험하고 달아보실 때가 있다. 때로는 순종의 믿음을, 때로는 겸손의 믿음을, 때로는 굳건한 믿음을, 때로는 헌신의 믿음을, 주님이 어떤 과목이든 나를 시험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끈기 있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이렇게 모욕적으로 거절했으면 포기하고 원망과 분노를 터뜨리며 돌아설 법한데 이 여인은 끈질긴 믿음으로 나아간다. "주여 옳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세상에서 우리의 소원이나 바람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끊임없이 거절하고 인생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성취와 포기는 거절이 강하냐 끈기의 믿음이 강하냐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끈기보다 포기하기를 더 잘한다. 그것은 끈기보다 포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중도에 포기했다면 자기 딸이 고침 받는 은혜는 없었다.
 
포기와 끈기를 잘 분별해야 한다. 그럼 그 기준은 무엇인가? 포기해야 할 것은 악한 계획과 생각,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고 죽이는 일에 끈기있게 매달렸다. 그 결과 그는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 죄악이나 악한 생각이나 계획을 잘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잘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승리한다.


하지만 바른 믿음, 좋은 생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끈기의 믿음으로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끝까지 끈기 있는 믿음으로 버텨야 승리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모두가 주님의 시험에 합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광열 목사
무안교회

토-계속 해야 할 기도
본문 : 골 1:9~12
찬송 : 254장

본문은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옥중에서 쓴 편지이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쓴 편지라는 것이다(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므로). 그럼에도 바울은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썼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기도했던 제목은 성도들의 평안과 삶의 욕구만족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바울이 무엇을 위하여 구하였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그중 하나가 '인식의 변화'이다.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못 알았던 것을 바로 알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영적무지가 큰 죄를 범할 수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우리도 이와 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선한 열매를 맺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과거에 하지 않던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을 시작한다. 예배를 드린다. 찬송과 기도,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봉사를 한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이 행함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행함이 있을 때 믿음은 온전하게 된다. 삶속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용기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셋째, 성숙을 위한 기도이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인격이 변한다. 과거에 참지 못했던 것들을 참을 수 있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신앙인격이 성숙해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오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인격의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서 성숙한 인품이 살아나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까지 쉬지 않고 해야 할 기도이다.
 
오늘의 기도
 
믿음의 분량이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재학 목사
울산온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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