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구체적 대면' 갖기 위해 몸부림쳐라

하나님과의 '구체적 대면' 갖기 위해 몸부림쳐라

[ 특집 ] 8월 특집, 표절에서 인용으로

김운용 교수
2015년 07월 28일(화) 14:38

일전 한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새 목회지로 떠나는 제자가 보내온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부임 3년차인 담임목사가 요즘 아예 한 유명 목사의 설교집을 그대로 베껴서 설교하는 것을 발견했단다.


"교수님께 '설교학 개론'을 배울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고, 생명을 걸고 준비하고 피토하듯 말씀을 전하여 교회를 바로 세워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아직 많은 게 어설픈 목회 초년병이지만 마음에 깊은 회의와 분노가 일어납니다. 남의 설교를 베껴서 설교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다면 당연히 목사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 목회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모른 척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옳은 일입니까?" 잘못된 일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곱다는 생각을 했지만 대략 그런 조언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이야길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참 안타깝고 무겁다. 그런데 당신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분이라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회 현장은 의외로 좁은 곳이다. 그 일은 주님께 맡기고 새 사역지로 조용히 가는 것이 좋겠다. 그걸 교훈 삼아 말씀 사역을 더 잘 감당하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젊은 사역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조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설교 표절이 문제가 되어 시끄러워진 그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상담 요청이 왔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당사자에게 직접 듣지 못했으니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결국 너무 바빠서, 혹은 시간 관리를 잘 못해 설교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거나, 설교를 잘하고 싶은 '과도한 욕심'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펴든 설교집의 내용이 은혜가 되어 차라리 이것으로 설교하자는 생각에서 그리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전반적으로 감당해야 할 설교 횟수도 많고, 사역도 바쁜 편이다. 설교가 사역과 예배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설교자의 설교 능력에 의해서 그 성패를 가늠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매체의 발달로 방송과 사이버 공간에는 설교가 넘쳐나고 있어 교인들도 이제 많은 설교자의 설교를 쉽게 접한다. 은혜 받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자기 교회 목사와 비교하기도 하고, 설교에 대한 불만도 높아갈 수 있다. 교인들의 갈망대로 매번 설교의 '홈런'을 치기도 어렵고 걸핏하면 비교를 하는 판이니 어떻게든 은혜를 끼쳐야만 한다는 부담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도용해서 마치 자기 것인 양 거짓되게 말씀 사역을 감당한다면 거기에서 우리가 믿는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치유와 회복, 돌이킴과 부흥의 역사를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도대체 기독교의 설교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남의 설교집을 베껴서 설교해도 은혜만 끼치면 되고, 그렇게 해서 교인 숫자만 늘어나면 모든 것을 다 덮어지는 현실이니 잘 숨기고 포장만 하면 되는 것인가? 도대체 설교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설교는 목회의 수단인가, 아니면 목적인가? 앨버트 모휠러가 주장한 대로 설교 사역은 '설교가 한 인간의 창작품이나 고안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은혜로운 창조물이며,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중심 사역이라는 겸손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설교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opus Dei)이라는 겸손한 인식이 없는 한 설교 사역은 언제든지 왜곡, 변질될 수 있다. 칼 바르트가 주장한 대로 설교자는 설교가 '하나님 자신이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학적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시 사건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너머 저편에 계시는 초월적인 분이시며, 스스로를 숨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는 그분을 알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행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그 세계를 알 수 있다. 마틴 루터의 주장대로 절대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그분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스스로를 '은폐하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시다. 그러나 택한 종들에게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시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현현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계시는 최종 형태인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된다(히 1:1-2). 하나님의 최종 계시이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을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를 그 증언의 봉사자로 세우신다. 그렇게 위임을 받은 설교자가 말씀을 들고 설 때 그분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그때 설교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사건'이 된다.
 
이런 신학적 고백을 가진 설교자라면 그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 즉 그분의 계시의 형식인 '말씀'의 세계에로의 참여와 들음이 필요하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에 먼저 참여함으로서 설교는 세상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분이 주시는 것을 이 땅에 활짝 펼칠 수 있게 된다. 설교자는 이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홀로 서있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의 깊은 대면 가운데서 이 사역을 감당한다. 계시하시는 그분과 그 말씀과의 '구체적 대면'(concrete confrontation)으로부터 설교는 시작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그러한 대면이 없는 설교는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고, 그가 전하는 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며 인간의 언설(discourse)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의 연구를 통해 배우고 누군가의 생각을 빌려 쓰며 산다. 인용과 표절은 아주 가깝지만 전혀 다르다.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설교 표절은 작은 도둑질이요, 유혹이다. 그것은 설교의 주체와 객체의 혼동에서 기인한다. 내가 설교의 주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시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이 설교요, 그분이 설교의 '주체'라는 고백이 있으면 다르다. 설교에 대한 그런 신학적 고백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구체적 대면을 갖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요, 더 성실하게 준비할 것이며, 그 유혹을 피할 수 있다.
 
박지웅 시인은 그렇게 노래한다.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배짱 한번 두둑하다/…칠 년 만에 받은 목숨/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마지못해 우는 것이 아니란다. 7년 만에, 아니 정확히 17년 만에 허락받은 목숨이요, 기회요, 외침인데 어찌 허투루 전할 수 있겠는가? 그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쓴 책은 바로 절판될 것이고, 그렇게 부르는 노래는 바로 히트곡이 될 것이고, 그렇게 외치는 설교는 세상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요즘 도심을 시끄럽게 하는 작은 매미에게서 배워야 할 지혜를 전하는 시인의 외침이 오늘 설교자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온다. 내 노래가 아닌데, 내 고백이 아닌데, 내가 경험한 진리가 아닌데, 내가 보았던 세계 아닌데 거기에서 어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과 영혼을 변화시킬 생명력이 나오겠는가? 그래서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도무지 없단다'는 시인의 외침이 더 새롭다.

김운용 교수/장신대 예배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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