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단의 현주소를 진단하다-에큐메니칼> 분열의 위기 딛고 연합의 중심에 섰다

<본교단의 현주소를 진단하다-에큐메니칼> 분열의 위기 딛고 연합의 중심에 섰다

[ 교단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 정병준 교수, "서구와 남반구,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 잇는 책임, 한국교회에 있다" 밝혀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5년 06월 17일(수) 18:00
   
▲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

총회가 걸어온 역사-교단 에큐메니칼의 역사를 중심으로

1. 총회설립 이전(1884~1911)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에 기초해서 복음주의적이면서 에큐메니칼적인 특징이 목회와 선교와 봉사 속에 녹아있는 교회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타교파와 최초의 에큐메니칼 협력을 시작한 것은 성경번역과 문서선교였다. 그 후에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선교지 분할협정을 통해 선교에 협력하였다. 1905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하나의 개신교회를 설립할 목적으로 '재한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를 조직하였으나 교파 연합은 실패했고, 그 대신 찬송가와 교회신문, 교육과 의료분야에서 광범위한 연합을 이뤄냈다.
한국에 온 미국의 남ㆍ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캐나다 장로회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끌어 내어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장로교선교회들은 '장로회공의회'(1893~1906)를 통해 신학교육과 권징, 선교를 통일시켰고 한국인 지도자를 훈련시켰으며 1907년에 독립노회를 세웠다. 그해 한국장로교회는 '만국장로교연합총회'(WPA, 개혁교회연맹의 전신)에 가입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복음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자립적으로 토착교회를 설립하는 자주성이 강한 교회였다. 장로교회의 첫 신조인 '12신조'는 개혁전통을 지키면서도 교파 절대주의를 채택하지 않았고 온건한 예정론을 언급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감리교와 대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2. 총회설립부터 해방까지(1912~1945)
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에 평양 경창문 안 여성경학원에서 조직되었다. 장로교회는 교세가 16만 명으로 자라나자 순수 한국교회의 연합체인 '조선예수교장감협의회'(1918)를 조직했다. 그 목적은 친교와 선교협력, 정보교환이었다. 장로교회는 선교와 봉사 안에서도 에큐메니칼 정신을 유지했다. 1912년 창립총회는 중국 산동성 선교를 결정했는데 이것은 한국과 중국, 미국 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선교였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중국 노회로 소속되어 활동했고 중국교회는 한국 선교사의 선교지에 독립성을 부여했다. 장로교회는 민족을 위한 디아코이나(애국민족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05인 사건'에서 피소자 81명이 장로교인이었다. 이러한 애국적 신앙전통은 3ㆍ1운동으로 계승됐다. 한국교회는 천도교와 불교와 연합한 가운데 3ㆍ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과 3ㆍ1운동 사건의 전모를 세계교회와 국제사회로 알려서 일제의 야만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들은 식민정책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의 에큐메니칼 특성은 공교회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한국장로교회는 교회연합의 중요성과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1924년 9월 24일 한국 장로교회는 6개의 외국선교회, 2개의 감리교단, YMCA, YWCA, 조선성교서회 등과 함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NCCK)를 조직했다. 이것이 현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출발이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반기독교운동과 신사조의 도전에 맞서 신학교육의 질적 상승, 신문 방송을 통한 전도, 절제운동, 농촌운동에 기여했다. 예루살렘 IMC대회(1928)에 참석했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들은 귀국하여 양 교단에 농촌부를 설립하고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하면서 한국교회를 분열시키는 동시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마수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서북교권과 남부교회들, 신학적 보수와 진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와 반선교사로, 교권과 반교권으로 갈라졌다. 기독교민족운동진영도 안창호의 동우회와 이승만의 동지회로 분열됐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단은 찬송가와 신문을 따로 발행했고, 선교분할협정도 폐기되었다. 교회가 분열되면서 신사참배에 대항하는 힘도 약해졌다. 1938년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해체됐고, 한국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관계가 단절되면서 해방 이후 에큐메니칼 정신을 계승하는데 큰 장애를 겪게 되었다.

3. 해방 후 분열 (1945~1960)
해방 후 '조선기독교단'은 1년 만에 교파 환원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연합기구로 존속되었다. 1948년 장로교 총회는 김관식 목사(NCC총무)를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표로 파송하면서 WCC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950년대 NCC는 한국전쟁 이후 세계기독교봉사회(CWS)를 통해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보급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반공과 교회성장을 위해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이 시기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는 고신파의 분열(1952), 기장의 분열(1953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1959년)이 일어났다. 1950년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은 동서냉전과 남북 빈부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칼 매킨타이어와 ICCC같은 극우 근본주의자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했다. 통합과 합동의 분열 과정에서 한경직 목사의 지도력은 통합측이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신학노선을 이어가는 중심역할을 했다. 한경직 목사의 목회철학은 첫째 복음주의 신학노선, 둘째 경건한 생활, 셋째, 에큐메니칼 정신, 넷째 사회정의 구현이었다. 한편 장로교 총회는 1957년에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 창립총회와 같은 해 아프리카 케냐에서 열린 가나 국제선교협의회(IMC)에 대표를 파송했다. 가나 IMC에서는 IMC와 WCC의 통합을 결의 했는데, 그 영향을 받은 북장로회선교부는 행정기구로서 선교회를 해체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 협동사업부를 두기로 결정했다.

4. 회복기 (1971~1980)
교단 총회는 합동 측과 재결합이 어렵다고 보고 1970년에 WCC의 재가입을 결정했다. 이것은 서울노회가 헌의하였는데 1968년 웁살라 총회에 옵서버로 다녀온 강신명 목사의 영향이 컸다. 1975년 나이로비 WCC 총회에 김형태 목사, 김윤식 목사, 노정현 장로가 참가하였다. 그 결과는 교단의 사회선교정책에 반영되었다. 1977년에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선교정책'을 발표하여, 우리교단의 선교 정책은 에큐메니칼적임을 명시했고,1978년에 '도시산업선교원리 및 지침'을 발표해 산업선교 활동을 보호했다. 1980년 12월 8일에는 고신 기장 통합 합동의 총회장 및 총무가 모여 '장로교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장로교총연합회'의 출발이었다.

5. 성장(1981~현재)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예장 통합 교단 안에서 민주화 인권 운동과 사회선교를 수행하는 청년 여성 목회자들의 지도력이 크게 성장했고, 교단 안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WCC를 좌경과 용공으로 매도했는데 제69회 총회(1985)는 'WCC 이해를 돕기 위한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제70회 총회에 그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여 WCC를 바르게 알리는데 기여했다. 1994년에 우리 교단총회는 여성안수허락의 건이 통과됐다. 2014년 우리 교단은 WCC 부산총회를 개최하는데 중심역할을 했으며 현재 우리 교단은 서구교회와 남반구교회 사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해줄 것을 세계교회로부터 요청받고 있다.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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