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3000호 특집>일촉즉발의 위기 속 광주시민 향한 뜨거운 마음 담담하게 풀어

<지령 3000호 특집>일촉즉발의 위기 속 광주시민 향한 뜨거운 마음 담담하게 풀어

[ 지면으로 보는 기독공보 ] ③ 1980년 5월, 광주 시민 향한 사랑을 담다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5년 06월 15일(월) 16:17
   
▲ 기독공보는 광주 폭도라는 거짓을 담지 않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광주를 위해 모금을 시작하자 1면 기사를 통해 '광주 시민'들을 돕자고 호소하고 나섰다.

1980년 5월 20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본부로 전라도 억양의 한 남자가 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여기 전북노횐데요. 총회 총무님, 빨리요. 급합니다." 전북노회라는 말 외에 어떤 신원도 밝히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 속에는 무슨 일이 터졌음을 암시하듯 긴장감이 실려있었다. 총회 사무국 직원은 곧바로 총무 성갑식 목사에게 전화를 돌렸다. 잠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 목사는 사무국장과 각 부서 총무들을 소집했다. "빨리요. 빨리 사무국장, 총무 다 소집하고 총회장 임원들께도 얼른 전화 연결하고, 교회와사회위원회 위원들도 총회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지난 해 12ㆍ12사태 이후 이른바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는 뉴스도 있었고, 또 광주에서 폭도들을 진압한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것말고 뭐 다른 게 있는건가... 하지만 좋지 않은 예감은 늘 현실이 되어 돌아온다. 낯선 전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회 지도부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총회 임원들을 비롯해서 교회와사회위원회 위원들의 연석회의가 시작된 것도 잠시. 회의를 돕기 위해 총회장실을 드나들던 비서실 직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 충격 그 자체였다. 광주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다던 계엄군이 18일 오후 4시를 기해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을 외치며 시내로 모여들던 시민을 향해 발포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 당했다는 비보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날 회의를 취재했던 기독공보 이기환 기자(전 총회 사무국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신군부가 드디어 피를 보고 정권을 도둑질하려는구나" 생각에 빠지려던 순간 회의실 문이 열렸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을 한 참석자들이 무거운 침묵 속에 하나, 둘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기자는 총회 총무를 붙잡았다. "무슨 논의를 하셨습니까?" "음... 우리 총회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광주를 향한 문이 열릴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고... 현지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긴급약품이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모금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하는 위급한 때니까..." 모금이라... 신군부가 끝내 국민을 향해 총뿌리를 겨누고, 광주시민의 피를 밟고 정권을 찬탈하려는 이때 총회가 모금을 결정했다는 건 신군부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미 언론들은 '광주에서 폭도를 진압하고 있다'는 보도를 시작한 마당이었다. 이와중에 모금을 한다면 누가 동참할 것이고, 신군부가 과연 침묵을 지킬 것인가... 머리가 복잡했지만 총회의 결정만큼은 두려움을 딛고 일어섰다.
이기환 기자는 편집국장 김태규 목사에게 달려갔다. "국장님. 총회가 광주시민을 위한 모금을 결정했습니다. 전국교회를 대상으로 한 모금이고 광주가 열리는 대로 총회 대표단이 현지를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공은 편집국장에게로 넘어갔다. 잠시 후 김태규 목사는 결정을 내렸다. "총회가 결정한 일이니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지면에 싣기로 하고 다만 신군부를 자극해 모금이고 뭐고 다 무위로 돌아가는 일만큼은 피하라."
총회의 결정이 있은 후 첫번째로 발행된 신문이 1980년 6월 7일자였다. 이날 신문 1면에는 '民族의 來日을 위해 기도하자'는 큰 제목이 자리했고 '광주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부제는 '총회 任員들 現地에 救護金 전달, 6月1日 光州위한 기도일로'로 뽑았다. 당시 일반 언론들이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했지만 기독공보는 시종 '광주시민'들을 돕자고 호소했다. "광주 사태에 즈음하여 광주시민과 민족의 내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되어야 하겠다. 본교단을 비롯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칭ㆍ위원장 조향록) 등에서 전국교회를 향하여 기도하도록 요청한데 따라 지난 주일 전교인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며 광주가 조속히 복구되도록 돕기 위해 헌금을 실시하기로 했다"로 시작된 기사에는 당시 총회 부총회장 박치순 목사를 위시한 총회 대표들이 광주로 향하는 문이 열린 5월 27일 바로 다음날인 28일 광주를 방문해 긴급 구호금을 전달했다는 내용이 담겼고, 광주에서 조직된 기독교광주사태구호위원회(위원장:한완석) 위원들을 만나 위로하고 함께 기도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더불어 5월 30일 연동교회에서 서울 지역 교역자들에게 광주사태에 대한 보고와 함께 합심기도했다는 내용이 기사 말미에 자리잡았다.
간단한 기사였지만 이 기사의 행간에는 신군부를 향한 날선 비판이 숨겨져 있었다. 물론 기사에 광주사태의 개요 등이 실리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신군부를 자극해 모든 걸 무위로 돌리지 말라'는 편집국장의 지침도 있었고 1980년 5월의 분위기로는 '더 나갈 수 없었던 현실의 벽'이 있었던 게 이유라면 이유다. 
이기환 장로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총무가 성갑식 목사였는데 매우 균형적인 분이었죠. 신군부가 총칼을 들고 설치고 다닐 때였고 기독교회관 앞에도 일찌감치 장갑차 2대와 군병력이 진을 치고 있던 상황에서 모금과 기사 게재가 결정됐으니 지금과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총회 임원들이 용단을 내렸고 기독공보도 광주시민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담담하게 풀어냈었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 분위기는 일촉즉발이었다고 할 수 있죠. 5월 30일, 광주 무력 진압을 비판하며 서강대 김의기 군이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해 장갑차 사이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습니다. 기세등등했던 신군부가 총회와 기독공보를 손 보려고 마음 먹었다면 눈깜짝할 사이에 모든 상황이 종료될 수 있는 긴박한 분위기였죠."
당시 사회부 총무였던 정봉덕 장로도 "총회도, 기독공보도 쉽지 않은 결정을 했었던 게 사실"이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정봉덕 장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총회가 광주시민이 억울하게 피흘리고 있는데 그런 결정도 못하면 무슨 총회야. 기독공보도 마찬가지지. 기독공보가 어떻게 광주시민을 폭도라 할 수 있겠어요. 광주시민들을 위해 헌금하고 기도했다고 보도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
선배들이 써 내려갔던 한자한자. 그 기록이 2015년 6월, 지령 3000호를 맞이한 기독공보를 향해 던지는 교훈은 준엄하고도 분명하다. 바로 '언론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 우리의 살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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