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문제

사적인 문제

[ 문단열의 축복의 발견 ] 축복의발견

문단열
2013년 12월 20일(금) 09:35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0~12)
 
옆집의 부부가 싸움을 한다. 보다 못한 이웃이 끼어들어 부인 편을 들며 남편에게 삿대질을 한다. 갑자기 부인이 이웃을 보더니 말한다. "이거 사적인 문제니 끼어들지 마세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한 지역을 지날 때였다. 선대 왕인 사울의 먼 친척 되는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란 사람이 다윗의 일행에게 다가와 갑자가 저주를 퍼부었다. "넌 많을 피를 흘렸으므로 죽어도 마땅하다"고 다윗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장수들이 칼집에 손을 가져가자 다윗이 황급히 말리며 하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일은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지독한 말을 내게 쏟아 내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내 자식도 지금 나를 죽이려고 덤비는데 하물며 이 다른 지파 출신의 사람은 말해 뭐 하겠는가. 하나님이 내가 억울한 것을 아실테니 이렇게 욕을 먹은 것 때문에 나에게 위로로 갚아 주실 것이다."
 
사람이 고통을 못 참는 것이 아니고 그 고통에 이유가 없는 것을 못 참는 것이며 또 사람이 고난을 못 견디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의 억울함을 못 견디는 것이다. 억울함은 모든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이다. 세살배기도 하루 종일 "왜?"라고 질문하는 게 인간이다. 사람에게 언어가 주어진 이후로 인간이 안 하고는 못배기 말이 '그건 왜 그런가?'이고 인간이 듣지 않고는 넘어 갈 수 없는 대답이 바로 '이유'이다. 그런데 지금 쫓기어 고단한 다윗 왕은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얕잡아 보고 퍼붓는 밑도 끝도 없는 독설을 듣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바로 얼마전까지 이스라엘과 이웃한 나라들을 호령한 왕에게 선대 왕의 부스러기를 먹던 인척이 그 밥그릇 빼앗긴 사사로운 원한을 들고 나와 오늘의 왕을 조롱하는 것이다. 사실 다윗이 아무리 쫓기는 신세라도 그에게는 대규모의 수행원들이 있었고 백전 노장인 그의 장수들이 시퍼런 칼을 차고 있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돌발사태에 대한 경호원들의 대응은 무시무시한 응징이었다. 그들은 즉각 칼을 빼어들 기세였고 한 번 칼이 칼집 밖으로 나오면 누군가의 목이 날아가는 것이 정한 순서였다. 그런데 다윗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있지도 않은 죄목으로 왕을 비난하는 시므이에 대해 왕은 "내버려 두라"고 한다. "하나님이 허락했으니 저러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부하들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왕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섬기는 왕이 무시를 당하는 것은 자신들도 무시를 당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가뜩이나 코너에 몰려 하루 앞을 모르는 불안한 때에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듯한 상대의 극악한 저주의 말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자식도 나를 해하려 하는데 저런 타지인은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 "장군들아 이건 자네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다."
 
다윗은 분노를 참고 있는 것도, 세상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윗은 언제나 사건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었다.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도 거인의 뒤에 거대하게 서 계셔서 거인을 작은 염소 새끼만하게 느끼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힘을 입고 나아갔고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온 나라를 이 잡듯 뒤질 때도 그는 사울에게 분노를 쏟기 보다 하나님께 고난의 의미를 묻고 있었고, 또 그가 잠자는 사울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에도 애초에 사울왕을 세우셨던 하나님의 권위를 의식해 그를 해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런 그에게 낯 모르는 타인의 핍박보다 훨씬 참기 힘든 집안 문제가 닥쳤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하는 핏줄이 정신이 반쯤나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이 상황에서도 다윗은 이 사건을 '하나님과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그 모든 고난이 다윗에게는 남들이 끼여들 일이 아닌 하나님과 그의 은밀한 '사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시각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보아야 하는 정확한 방법이다. 거창한 용어로 '신학'이다. 현명한 사람도 넘어지고 지식있는 사람도 시험에 든다. 왜 그런가. 모든 문제를 '세상과 나'의 관계속에서 보기 때문이다. 남편이 속을 썩이면 남편 안에서만 문제를 찾으려 한다. 실패한다. 내가 병에 걸리면 내 안에서만 문제를 찾으려 한다. 역시 안 된다. 우리의 모든 문제, 우리의 모든 고난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문제' 속에 그 해답이 있다. 문제가 생기는 즉시 우리는 문제를 내려다 보지만 정답은 반대로 '올려다 보는 것'이다. 다윗의 믿을 수 없을 만큼 현명함은 그의 문제에 대한 반응이 언제나 '올려다 보기'였다는 것이다. 그에게, 관계는, 성취는, 성공은 기쁨은, 슬픔은, 고통은, 세상살이는, 인생은 모두 하나님과의 '사적인 문제'였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의 모든 기쁨은 나와 하나님의 '사적인 문제'이다. 누가 끼여들 일도 아니고 누구를 탓해선 안되는 문제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본질을 벗아나고 문제해결은 미궁으로 들어 간다. 그런데 사적으로 풀 일을 사방에 떠벌려 공적으로 만들고 핵심을 비껴가는 난리법석을 떨어 모두를 시험들게 하는 것이 우리이다. 악하다. 많이 악하다. 그런 짓을 하면서도 무의식 속에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괴로워한다. 하지만 고난이 닥치면 또 남탓을 한다. 시므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 안에 있다.
 
다윗을 보자.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자. 세상살이는, 세상과 나를 만드신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분과 나의 '사적인 문제'임을 마음에 새기며.

문단열 / 전 성신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