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달린 꽃을 예수님이 보신다면

가슴에 달린 꽃을 예수님이 보신다면

[ 목양칼럼 ] 목양칼럼

박은호 목사
2013년 11월 14일(목) 10:28

논어에, 군자는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있다. 군자는 스스로 남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도, 가슴에 꽃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데, 우리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회 안팎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는 으레 가슴에 꽃을 단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등장한다. 참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오래 전에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 임직예식이 있었다. 장로ㆍ집사ㆍ권사임직을 하는데 임직예식이 시작될 시간이 가까이 오자 당회실 주변 복도에 갑자가 꽃을 단 부대가 등장했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꽃을 단 분들이 그날의 임직자들인가 했는데, 가만 보니 당회원들이 모두 가슴에 꽃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참 의아스러웠고 많이 놀랐다. 가슴에 꽃을 단 행위를 보는 순간, "그들은 회당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요, 시장에서 문안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하시던 예수님 말씀이 오버랩 되었다.
 
어디 임직에만 그런가? 무슨 무슨 총회라며 모일 때마다, 한 해 수고하고 물러나는 자리마다, 하루 이틀 수고하고 무슨 회를 마칠 때마다 등장하는 감사패 증정, 공로패 증정 등, 우리 안에 습관적으로 관례가 되어버렸고 그것이 아무런 고민 없는 전통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와 반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가?
 
이는 안 될 일이다. 미국교회들이 유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에 무관심한 교회이듯이,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종교개혁이 무엇이냐며 반문하는 교회이듯이, 습관이 되어버린 세속적인 구습들이 우리 교회 안에 견고하게 의례(의식, 예식)로 자리 잡고 있는 일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또 목회자들이 일생 목회하고 은퇴할 때, 원로목사 추대도 하고 노회에서 공로목사 추대도 하면서, '찬하사'라는 일반사회 어디에도 잘 쓰지 않는 용어를 가져다가 쓰는 새로운 풍속도가 일기 시작했다. '찬하사'란 옛 왕조시대, 왕이나 아주 신분이 높은 고관들을 칭송할 때 쓰던 비속어인데, 어찌 우리 목회자들이 그런 용어를 갖다가 쓸 수 있는가? 당치도 않을 말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말씀이 있지 않는가!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하시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을 따르는 종이라면서, 주님의 가르치심에 반하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가? 왜 이리도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린 것인가? 주의 일을 한다고 가슴에 꽃을 달고, 공로패 받고, 찬하사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수치와 부끄러움, 상하신 주님의 몸, 흘리시는 보혈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외식하는 바리새인 서기관의 길을 가는것 아닌가?
 
한국교회는 지금 외식하는 바리새인 서기관의 신앙과 삶을 버릴 때이다.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때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처럼, 그 누구 사람을 본받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본 받는 교회로 거듭나자!

박은호 목사 / 정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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