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절제의 미학

두 가지 절제의 미학

[ 목양칼럼 ] 목양칼럼

노창영 목사
2013년 07월 10일(수) 11:22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요구되는 최후의 덕목은 절제함의 아름다움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열매는 바로 절제의 열매이다(갈 5:22~23). 그리스도인이 절제해야 할 많은 분야가 있지만 두 가지만 상고해보자.
 
먼저,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절제이다. 오래 전에 작은 도시에서 목회하시던 어느 목사님의 하나뿐인 따님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이 목사님은 수요일 오전에 딸의 시신을 매장하고,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를 하였다. 작은 교회라서 대신할 설교자가 없어서 딸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안고 강단에 섰다. 이것이 목회자요, 설교자이다.
 
설교자는 마음이 아파도, 부부싸움을 해도, 설교할 기분이 안 나도, 정확히 시간이 되면 강단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자기감정을 초극하는 절제의 터널을 지나야 성숙한 목회사역과 말씀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이 두 사람을 삼켜서 죽여 버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자의 아비와 형제들에게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죽음을 면하라고 하셨다(레 10:1~7). 이 상황에서의 애곡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항변이이요, 불평의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두 아들을 잃고도 애도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삶이다. 때로는 피눈물을 가슴에 삭이면서 절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사업이 힘들다고 장로가 대표기도 자리에 안 나오고, 아들 녀석이 사고 쳤다고 교사가 결석하고, 화나는 일이 있다고 성가대원이 자리에 앉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는가? 우리는 감정절제의 미학을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이다 가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이 울 수도 있고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감정의 초극이 필요하다(고전 10:23).
 
둘째, 비본래적 활동의 절제이다. 줄기세포연구로 유명한 황우석 박사의 연구조작설이 밝혀지면서 김수환 추기경이 한 마디 한 것이 생각난다. "학자는 연구실에서 죽을 각오로 일해야지 … 학자가 정계, 재계 지도자들과 사진 찍고, 기념비 세우고, 로비하고, 돌아다니고…". 학자들은 연구실에서 뼈를 묻어야 학자답다. 등산가들은 산을 타다 죽어야 이름이 남는다. 찬송을 맡은 레위족장들도 골방에서 주야로 그들의 일에 골몰하였다(대상 9:33).
 
목회자들도 교회에서 죽는다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본래적인 교회 사역은 뒤로 제쳐놓고 노회, 총회, 연합회 일로 회의하고, 조찬모임 갖고, 사우나 하고, 뷔페 먹고, 로비하고, 여행 다니고 하는 비본래적 활동은 절제되어야 한다. 장로, 집사, 권사들도 임직 받은 자기 교회의 섬김과 봉사는 뒷전으로 하고, 각종 교회 연합회 활동, 취미 모임, 동창회 같은 외부 활동에 지나치게 묶여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본래적 활동을 방해하는 비본래적 활동을 절제해야 한다. 총회와 교계에서 큰 일을 하시고 은퇴하신 한 목사님께서 어떤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에 말씀 하신 것이 기억난다. "총회 임원, 연합회 활동, 신학교 강의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다 후회합니다. 목사는 목회만 해야 합니다." 본래적인 활동을 뒤로하고, 비본래적인 활동을 하는 일은 아름답지 못하다. 절제는 자기를 다스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뒤따르지만 그 열매에는 아름다운 미학이 있다.

노창영 목사 / 개봉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