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는 사랑을 원하시나요?

상처 없는 사랑을 원하시나요?

[ 생명의양식(설교) ] 생명의양식

김인주 목사
2013년 07월 04일(목) 14:01

▶ 본문말씀 :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사람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도와주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다면, 좋은 인품을 갖춘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복수형으로 친구들이라고 읽는 것이 낫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족이나 연인 혹은 친한 벗 대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 그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보다 다른 데 있습니다. 과거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과 미래의 소망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을 비교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쪽을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까? 복음서는 일관성 있게, 미래의 소망을 함께 나누는 동지들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르던 무리들을 향하여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인정하셨고 위로하셨습니다. 
 
분단과 전쟁, 이에 따른 아픔과 상처는 쉽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경과 영토에 관한 초보적인 질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 우리 정치권과 사회의 수준입니다. 하나도 양보하지 않은 채, 이익만을 얻으려는 생각이 이 세상 어디에서 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생각으로 완고하게 버티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퍽 많은 듯 합니다. 불신과 적대감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까?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소유와 지배의 원리, 마치 운동경기장의 전술과도 같은 가치관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그 경영의 기술이 교회와 목회의 중요한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협력과 일치보다, 경쟁과 승자독식의 시장의 원리가 먼저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어도 내가 감수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외가 있습니까? 내가 받을 손해를 거부하거나 무시한다면, 사랑을 빙자한 거래나 지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내가 오히려 먼저 그 아픔을 당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사랑은 한 없이 버리는 것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까지 버릴 수 있습니까? 자존심과 명분을 조금도 다치지 않으면서, 풍족히 쓰다가 남은 것 중에 일부를 주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할 일을 충분히 다 했다고 자만하지 않는지요?
 
치밀한 계산과 이기심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대신, 우리 이웃을 변화시키고, 북한의 동포들을 품을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불신의 장벽을 넘어서고 원수까지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머뭇거리며 외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며 희생하는 사랑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기로 하셨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길에 우리가 함께 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김인주 목사 / 봉성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