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존직 선거 유감

항존직 선거 유감

[ 목양칼럼 ] 목양칼럼

홍성호 목사
2013년 06월 05일(수) 15:59

어느 교회나 있을 법한 일일 것 같은데, 내게도 참 씁쓸한 경험이 하나있다.
 
몇 주 전인가 어떤 장로님이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곧 장로 등 항존직분 선거가 있는데 선거운동이 활발하다' 대강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걸작인 것은, 그 말씀을 전해주신 분이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장로님만 그걸 몰라요?" 그러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혹시 선거 얘기 꺼내신 적 있으세요?"라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괜찮아요, 담임 목사도 모르는 일인데요, 뭐…!"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담임 목사도, 당회를 이끌어가는 장로님들도 모르는 선거 이야기가 교회의 몇몇 인사들을 통해 은밀히 퍼지면서 세(?)를 규합하고 있다는 것이.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어떤 직분이든, 우리가 교회에서 그 직분을 사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나 목사됨이라는 것도 세상에서와 똑같이 어떤 권세나 명예를 얻고자 함은 아닌지."
 
만약에 그런 부분이 있다면 성공지상주의가 세속화의 물결과 함께 교회 내에도 이미 들어와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직분, 특히 항존직분, 곧 안수집사나 권사, 장로됨이라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 성공, 또는 신분 상승의 한 유형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적 권면의 형태로 감독(또는 장로)과 집사 직분에 대한 자격을 명백히 하고 있다.(딤전 3:1-13) 그 시대적 상황과 형편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그 본문을 향해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이 기준이 필요하며…", 더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교회에 이 직분이 필요한가?"
 
묘하게도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 이 질문들이 다뤄졌다.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세우는 장면(행 1:15~26)을 통해서다.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22절), 그리고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24~25절).
 
마찬가지로 소위 일곱 집사를 세워가는 과정(행 6:1~7)에서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3절)을 택하여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는 베드로의 선언(4절)에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5절) 일곱을 세웠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라는 놀라운 사건이 터지지 않았는가?
 
결국 이렇게까지 말하게 된다. "직분은 본질이 아니다. 교회가 본질이다. 직분은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과정이자 도구이다."
 
이런 것을 적용해 보면 어떨까? 자녀들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함께 교회 출석하지 않으면 아예 피선거권에 제한을 둔다든지, '다른 교회라도 출석하면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지'라는 볼멘소리도 나올 법 한데, 신앙의 대물림과 한 교회의 선한 전통을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또는 어떤 직분을 사모하면 어떤 봉사부서에서 3년을 꾸준하게 봉사하게 한다든지 등 아부도 일관성 있게 한다는데 하물며 '하나님 향한 충성'은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홍성호 목사 / 순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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