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민중항쟁 즈음 문용동 전도사를 기억하며

5ㆍ18 민중항쟁 즈음 문용동 전도사를 기억하며

[ 기고 ] 독자투고

장헌권 목사
2013년 05월 15일(수) 15:37

교회 역사가들은 본회퍼를 20세기의 순교자라고 말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이론은 있지만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었다. 정의를 위하여 행동하는 고난에 참여한 순교자다. 도상에서 피를 흘린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정치적인 결단과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세상 속에서 당하는 하나님 고난에 동참한 것이다. 주기철 목사 순교가 '기독교적-교회적 순교'라면 본회퍼 목사 순교는 '기독교적-정치적 순교'다.
 
다시 5월이다. 5ㆍ18 민중항쟁 당시 유일한 광주 교역자 희생자 故 문용동 전도사를 잊을 수 없다. 필자가 신학교 3학년일 때 문 전도사는 군대에서 전역한 후 복학을 한 상태였다. 선배로서 살갑고, 독서를 즐기는 조용한 분이었다. 문 전도사는 그동안 사회와 교회 속에서 받아온 여러 갈래의 오해와 편견이 있었다. 군사정권하에서 5ㆍ18 희생자라는 점을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은 '정부 기관원(프락치)'이었다는 누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 전도사가 남긴 일기와 주변 증언이 공개되고 동문과 후배들이 나서면서 2000년에 호남신학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문 전도사는 1980년 5월 18일 교회를 다녀오던 길에 공수부대회원에게 맞는 노인을 돕다가 함께 폭행 당하면서 다음날부터 매일 시위에 참여 했다. 22일에는 도청에서 결성된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 지하실의 무기관리 임무를 맡았다. 이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서른 두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가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당시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문 전도사는 무기고 안에 있던 수만 발의 탄약과 3000여 상자의 다이너마이트가 잘못 터지면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리라는 판단으로 뇌관 제거에 나섰고 그 후로도 "내가 죽으면 태극기로 덮어 달라"는 말과 함께 현장을 지켰다. 마지막 순간에 투항하려다 계엄군의 조준 사격에 생을 마감했다.
 
2011, 2012년 총회 차원에서 고 문용동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그 동안 문 전도사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재조명하는 추모 행사였다.
 
한일장신대학교 배경식 교수는 광주의 희생양이며 행동하는 기독교인으로 문용동 전도사를 호남 지방이 낳은 동학의 접주 전봉준과, 독일에서 나치에 항거한 본회퍼,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젊은 청년의 죽음을 대신한 콜베신부와 비교한 논문을 썼다.
 
올해로 광주민중항쟁 33주년을 지났다. 총회에서 순교자의 의미를 확대 해석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순직자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려고 한다.
 
고 문용동 전도사는 끝까지 무기고를 사수 함으로써 광주의 절반과 수많은 광주 사람들과 계엄군들의 목숨까지 살린 것이다. 이제 그를 행동하는 이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선정해야 한다. 그는 분명 하나님 말씀과 현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의 삶을 살았던 21세기 순교자다.
 
묘역 묘비 글이다. "고난과 아픔을 싫어하고 멋있고 안일만을 살려는 오늘의 마음들-비인간화의 약취와 소외의 먹구름이 짙게 깔린 그곳 그것들을 떠나 광야로 간 세례요한. 나는 나의 자리에서 기독자로 현존하는가. 당신의 아픔을 아프게 하소서. 십자가로 부르는 음성을 듣게 하시고 당신의 눈빛을 불태웠던 것들을 외면치 말게 하소서."

장헌권 목사 / 서정교회ㆍ전남 NCC인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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