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과 보상심리

선행과 보상심리

[ 기고 ] 선행과 보상심리

오창학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2월 24일(월) 09:41

[독자투고]

연말이 되면 대부분의 교회가 은퇴식과 임직식을 거행하며 구세군의 자선남비 등장과 더불어 교회 안팎의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구제활동이 행해진다. 구제와 같은 선행은 굳이 연말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마땅히 하여야 할 교회의 의무이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어느 자선단체이든 간에 선행을 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한다든가 보상심리가 작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선행이 아니다.
 
언젠가 모교회에서 어떤 성도가 거금의 헌금을 하면서 교회 안팎과 그 지역의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얼마 후 치러질 그 지역의 국회의원 출마를 위한 포석작업이었다는 얘길 듣고 씁쓸했었다. 교회 내에서 항존직 선택에는 그런 경우가 없을까?
 
채근담(菜根譚)에 이르기를 위악이외인지 악중유유선로(爲惡而畏人知 惡中猶有善路) 위선이급인지 선처이유악근(爲善而急人知 善處則是惡根)이라고 하였는데, 즉 나쁜 일을 하고서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자는 그 악함 가운데서도 오히려 선을 행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요, 착한 일을 하면서 남이 알아주기에 급급한 자는 그 선행 속에서 이미 악의 뿌리가 있는 자니라고 하였다.
 
하물며 주님께서는 기도나 구제와 같은 선행을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영광을 받으려는 것과 같은 보상심리로 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가르치셨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에게 선행을 하였느냐 아니하였느냐가 예수님께 대하여 하였느냐 아니하였느냐의 문제이며 결국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는 그렇게 결정된다고 가르치셨다. 여리고 도상의 강도 만난 자에게 무관심했던 레위인이나 제사장과 달리 신분이 천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결단코 어떤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아니한 순수한 선행이었다. 그야말로 그는 주님이 인정하는 선한 이웃이었다.
 
종종 사회로부터 천주교나 불교는 대사회 봉사자선사업을 많이 하는데 개신교는 뭘 하느냐, 너무 인색하지 않느냐, 이미 고인이 된 천주교의 모 추기경이라든가 불교의 모 승려를 거론하면서 개신교에 대해선 그런 인물이 없느냐고 폄하하는 경우를 본다. 물론 개신교 내부에 부끄러운 치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론이나 매스컴에 발표되지 않았을 뿐이지 개신교가 천주교나 불교 못지않게 더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본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뿐이다.
 
필자가 10년동안 영락교회에서 시무할 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모셨던 고 한경직목사는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분으로서 결단코 천주교의 모 추기경이나 불교의 모 승려보다 뒤지지 않는 분이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말년에 세가지 과오로 폐위되고 비참한 말로로 생을 마감했다. 취해서는 아니 될 전리품을 취했고 제사장이 집례하여야 할 제사를 왕이라는 신분을 앞세워 임의로 집례했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자기의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를 세웠던 것이다. 공적비라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보상심리의 표현인 것이다. 오늘날도 모든 위정자들이나 지도급의 인사들과 선한 사업을 한다는 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다 보시고 계시기에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인간이 주는 그 어떤 것보다 큰 것으로 영적 보상을 해주시는 것이다.

오창학목사/신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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