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가 작은 자를 돕는다" 영화 '철가방 우수씨'

"작은 자가 작은 자를 돕는다" 영화 '철가방 우수씨'

[ 말씀&MOVIE ] 영화-철가방 우수씨

최성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1월 28일(수) 11:25
[말씀&MOVIE]

철가방 우수씨(윤학렬, 드라마, 12세, 2012)

인간은 상대적인 언어에 익숙해져 있다. 생존경쟁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를 이끌고 있는 각종 여론매체의 보도 태도의 핵심은 상대적인 것을 극대화시키는 일이다. 예컨대, 얼마 되지 않은 수를 백분율로 환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교회도 상대적으로 생각한다. 교인 수와 교회 크기에 따라 목회자의 능력을 가늠하려고 한다. 교회가 이렇다 보니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상대적이다. '작은 자'에 대한 이해가 대표적이다. '작은 자'는 큰 자, 부자, 좋은 환경에 있는 자, 강한 자, 권력이나 명예가 있는 자 등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돕기 위해 커야 하고 가져야 하고 또 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울 수 있는 재원이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결코 수나 양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수와 양을 통해 가능성을 확보하려 했다. 많은 성도를 필요로 했고, 큰 교회를 원했으며, 물질적인 복을 구했다. 그리고 이제 사회적으로도 제법 큰 압력단체로 인정받았다. 대선이나 총선 때 대형 교회 주변에서 정치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성경적일까?

성경은 인간의 본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곧, 큰 자가 되려는 마음을 지적한다. 이것이 원죄의 모습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며 사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 본성이 큰 자를 지향한다는 말은 '작은 자'에 대한 이해가 달라야 할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작은 자'는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평가되는 신학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며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며 사는 모든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작은 자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도 작은 자로 부름을 받았고, 사울이나 다윗도 작은 자로서 부름을 받았다. 열두 사도나 사도 바울이나 모두 작은 자였다. 예수님은 가진 자로서 작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스스로 큰 자이길 포기하고 작은 자로 오셨고, 작은 자로서 작은 자를 섬기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 역시 작은 자로서 작은 자를 섬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서 부름을 받은 자는 작은 자고, 성경은 우리가 작은 자로서 작은 자 곧, 이웃을 사랑할 것을 말한다. 결코 강하거나 많거나 부유하거나 커야 작은 자를 섬길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섬기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거나, 커야 한다거나, 많이 가져야 한다거나 높아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도울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와야 하는 것이 먼저고 누구든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믿는 사람은 그 부르심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한다.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는 것에 불과하다. 도왔고 베풀었다고 생색을 낼 이유가 전혀 없고, 그것을 빌미로 전도하려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다. 그저 도우면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또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나타내려 할 뿐이다. 나눔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모두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며 성경은 작은 자가 작은 자를 돕는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이 사실을 아주 잘 드러내는 영화는 '철가방 우수씨'다. 이 영화는 중국음식 배달원으로 70여 만원의 월급을 받고 일하며 고시원에서 기거하면서도 여러 어린이를 돕는 삶을 살다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게 된 기부천사 고 김우수씨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고 김우수 씨는 작은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매스컴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어 이곳에서 반복하는 것은 사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작은 자로서 작은 자를 섬길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먼저는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긍휼이다. 그 자신이 고아로 자라면서 힘든 삶을 살았고, 폭력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들의 삶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을 긍휼히 여겼으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데에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려움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주변에 힘겨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또 힘을 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그들을 돕는 가운데 스스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돕는 일이 그에게 삶의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본다. 그는 작은 자를 도우면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마치 마25장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푼 자들이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작은 자로서 작은 자를 돕는 신비는 베품의 양과 크기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큰 사람이 아니었고, 많이 가진 자가 아니었다. 강한 자도 아니었고,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도울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도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자였다. 그러나 작은 자로서 작은 자를 돕는 중에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는 큰 자가 되었다. 고 김우수, 그는 작은 자의 벗이 되기 위한 우리의 뇌리에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할 사람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하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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