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의 유익(上)-타슈켄트의 추억

해외여행의 유익(上)-타슈켄트의 추억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타슈켄트의 추억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1월 14일(수) 09:35

[최종률 장로의 빈방 이야기]

필자는 순회공연만으로도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해외여행의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가 외국에 나갈 일이 생기면, 그 목적이 공연이든 업무든 단순한 여행이든 간에 시간을 쪼개가며 알뜰하게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오래전에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당시 대우자동차가 우즈벡에 생산라인을 건설하면서 한ㆍ우즈벡 간의 경제협력과 더불어 문화교류의 장을 여는 의미에서 양국의 예술인들과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일종의 TV버라이어티쇼가 기획되고 있었다. 한국의 KBS와 우즈벡의 국영방송국이 공동주최한 그 행사에서 필자는 KBS 측 외주회사의 기술자문위원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외주회사 사장과 KBS 소속의 세트 제작담당 목수들과 함께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실크로드 끝자락의 고도를 보게 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었다. 옆 좌석에 거구의 백인남자가 앉았는데 짧은 영어로 인사를 나누다보니 그가 말레이시아 황실의 주방장인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레이시아ㆍ우즈벡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데, 현지의 식재료들을 점검하고 식단을 짜기 위해 미리 타슈켄트로 가는 길이라 했다. 마침 기내식이 제공되는 시간이어서 전문가의 입장에서 음식을 평가해 달라고 했더니 괜찮은 편이란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지갑을 꺼내며 말레이시아인인 부인사진을 보여준다. " She is very beautiful!"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희희낙락이다.

해 질 무렵에 도착하여 바라본 타슈켄트는 적막했고 울창한 가로수길이 인상적이었다. 숙소인 우즈벡 호텔은 최고급호텔이라는 정보와는 달리 세면을 위해 수도꼭지를 틀자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침상 밑으로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다. 국력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무대제작 회의는 한번 시작되면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본 회의를 시작하는 식이다. 그것도 닷새 동안이나!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회의장인 인민극장 안팎을 살펴봤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극장의 벽면들은 고색창연했고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는 무대에는 놀랍게도 회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1백년은 족히 됐을 법한 낡은 극장에 회전무대가 있다니! 무대에서는 발레교습이 한창이었는데, 젊은 피아니스트의 반주에 맞추어 백발의 할머니 선생님이 증손녀뻘인 발레복 차림의 어린 소녀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춤동작을 가르치고 있었다, 삽시간에 감동이 밀려왔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구소련의 예술적인 저력과 문화적 유산의 깊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타슈켄트에만도 오페라와 연극 그리고 발레를 공연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극장이 여러 개 있단다. 호텔로 돌아온 후 휴식을 취하면서 TV를 켜자 여러 채널에서 이슬람문화의 우월감을 나타내듯 다큐물과 수준 높은 예술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도착 직후 호텔에서 느꼈던 우즈벡의 국력에 대한 저평가가 지렛대를 타고 급상승하는 듯 했다. 지금은 국력의 척도가 경제력보다 문화수준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문화현실이 겹쳐졌다. 과거에 비해 전국적으로 공연장은 분명 많아졌지만 그 안을 채우는 콘텐츠는 여전히 빈약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지방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해서 예술 프로그램 대신 공무원 교육이나 민방위 교육장소로 때우기 일수다. 어쩌다가 대관을 하게 되면 고가의 조명, 음향장비에는 아예 손도 못 대게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잘 지어놓은 공연장에 양질의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연중무휴로 채우면서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맞다보면 어느새 국민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높아질 것은 분명하다.

같은 의미에서 공연공간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지역주민에게 장소를 제공하거나 복음적 주제의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무료관람을 유도하는 것은 어떨까? 문자 그대로 문화선교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례로 필자가 섬기고 있는 동숭교회는 해마다 부활절을 끼고 있는 한 달간 대학로에서 어렵사리 공연활동을 하고 있는 기독교 극단을 선정하여 교회의 문화공간인 엘림홀을 무상으로 대여하고 있다.

일정에 쫓겨 이슬람 유적들이 잘 보존돼 있는 인근지역 사마르칸트를 못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타슈켄트는 내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느끼듯 여행은 의미를 찾는 나그네에게 보물이 감춰져있는 비밀의 장소를 살포시 드러내주는 은혜를 베푸는 모양이다.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