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의 단초는 무엇일까, 용의자 X

교회 개혁의 단초는 무엇일까, 용의자 X

[ 말씀&MOVIE ] 영화-용의자 X

최성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1월 02일(금) 15:33
[말씀&MOVIE]

용의자X (방은진, 미스터리, 드라마, 15세)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좌우된다.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또 구원의 약속을 확증하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을 확신하며 기대와 소망 가운데 개인과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뜻 그리고 계획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실천이다. 이것은 시대정신에 따라 강조점만 달라질 뿐, 본질에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세습, 개인의 탐욕, 인맥과 학맥에 무릎을 꿇는 신학교와 교회, 목회자의 도덕적 윤리적 성적 타락 등으로 점철된 오늘날 기독교는 기득권의 위치에 서 있고, 종교의 위치로 전락했으며, 본질이 사라진 종교, 결국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으로만 보인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기독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기대감이 떨어진 이유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진지한 반응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을 나타내려는 실천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첫 사랑, 초심을 잃은 에베소 교회로 시작해서 이제는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된 듯하다. 교회 개혁의 단초는 초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의미 있게 감상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영화가 있어 소개한다.
 
'용의자 X'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2009년도 일본 영화 '용의자 X의 헌신'(니시타니 히로시 감독)을 전제한다. 차용해왔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원작에서 다소 벗어난 인물 설정을 제외하면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 영화는 천재 수학자가 완벽한 범죄를 위해 만들어낸 알리바이와 그의 고등학교 동창으로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형사의 추리 이외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집중하는 데 반해, 일본 영화는 수학과 물리학 분야의 두 천재의 밀고 당기는 긴장관계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두 천재의 두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진 않았지만, 문제를 내고 문제를 푸는 과정을 이끄는 캐릭터 설정이 흥미로웠다.
 
미모의 여인으로서 전직 술집 호스티스 화선(이요원 분)은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며 자신을 이모라 부르는 조카와 함께 단란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전 남편이 찾아오기 전까지 두 사람의 일상에는 화사한 햇빛이 비추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전 남편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자 반항하던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그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음을 통해 사안을 감지한 고등학교 수학교사로서 옆집에 사는 석고(류승범 분)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계획하게 된다. 알리바이를 위해 그가 만들어낸 문제는 함정문제였다. 기하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함수문제인, 다시 말해서 생각을 조금 달리 하면 풀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때까지는 전혀 다른 문제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수사관들이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알리바이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심지어 거짓말 탐지기까지도 통과할 정도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영화의 내용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찾아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형사(조진웅 분)와 그의 친구 수학천재 석고의 두뇌 싸움으로 전개된다.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의 제목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어느 정도 드러나 있지만, 추리 이외에 주제적인 측면에서 영화의 초점은 석고가 화선의 우발적인 사고에 대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낸 이유에 맞춰져 있다. 완벽한 수학, 아름다운 수학을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던 석고는 어느 순간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생을 마감하려고 했을 때, 그는 옆집으로 이사 온 화선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석고의 헌신, 곧 그의 희생적인 알리바이 조작은 화선의 존재가 그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학자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일어나는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친구인 형사는 석고의 행위와 동기에 대해 아깝다고 한다. 뛰어난 두뇌로 이런 일밖에 할 수 없느냐고 비난한다. 그러나 석고는 가슴으로 느끼는 사랑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한 화선에 대한 최선의 보답 행위로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형사의 설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일이지만, 그동안 화선에게 스토커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던 그의 모든 행위들도 결국에는 그녀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관객은 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사랑과 헌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위법적인 행위를 매개로 이뤄진 알리바이 조작이지만, 그것은 추리극의 성격상 그렇게 설정한 것일 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 화선을 위한 석고의 사랑과 헌신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의미가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인의 초심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도록 해주신 십자가 사건을 되새기며, 그분의 뜻과 계획이 세상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에서 발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희생이 따르든 그것이 이뤄졌을 때,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어떤 예술적인 노력으로 일궈낸 것보다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바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뤄지도록 순종하는 데에 있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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