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장열전 안경운목사ㆍ림인식목사

총회장열전 안경운목사ㆍ림인식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총회장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05일(금) 10:56

[김수진목사의 총회장열전]

안경운(安庚雲, 1928-1993)목사는 전북 김제 죽산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문을 열었던 총회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3년 과정을 이수하고 1953년 환도 후 서울 영락교회에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곧장 김제 신보교회의 청빙을 받고 1954년 김제노회 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예장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로 김제노회에 속한 태반의 교회들이 합동측으로 가담을 했으며, 안경운 목사와 김학만 목사는 목사안수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어서 통합 김제노회를 힘에 겼 도록 지켜 왔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익산에 있는 신광교회를 부임하면서 그의 목회실력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계에 익산시는 신광교회를 통해서 기독교의 기반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더욱이 익산시는 원광대학교를 비롯해서 원불교회의 본산이기도 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안경운 목사의 목회 실력이 인정이 되자 익산시가 마치 기독교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는 소식들이 여기 저기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안경운목사는 총회장으로서는 사회했을 뿐 아무런 할 일이 없어서 이때 군산노회 총대가 되지 못하여 총회 개회 선언만 하고 신광교회에 내려와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나섰다. 그의 열심 때문에 익산시에서 가장 큰 종교집단 공동체가 되었다. 이렇게 이리신광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생활비를 받으면 곧바로 가난한 교인들,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는 전도사들의 생활비로 다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마지막 신광교회를 떠날 때는 통장 하나 없이 살았다는 일화가 남았다. 이러한 목회철학 때문에 이리 신광교회는 계속 부흥성장하면서 원불교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교회가 되었으며, 그가 뿌려놓은 복음의 씨앗이 자라서 전국적으로 기독교 인구 밀도가 35퍼센트로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게 됐다. 이러한 걸음이 바로 안경운 목사의 목회 철학이었다. 
 
 
제68회 총회장 림인식

림인식(林寅植,1926-현존) 목사는 중국 요령성 심양에서 림재수와 김숙현의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을 하였다. 림인식은 3세가 되던 해 중국 심양에서 할아버지의 고향 박천으로 이사를 하였다. 해방이 되자 신의주 공업전문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1947년에 졸업하였다. 194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평양창동교회 전임 전도사로 사역을 하던 중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의용 지원병으로 참전하자 숫자에 밀린 유엔군과 국군이 12월 4일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를 하게 됐다. 림인식전도사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을 탈출하여 해주를 거쳐 미군의 피난선을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1951년 부산에서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말을 듣고 졸업반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였다. 피난지 부산에서 졸업한 림인식은 곧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제15육군병원에서 군목생활을 하였다. 경희대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를 하였다. 1957년에는 부산 동광교회 동사목사로 목회를 하였으며, 1959년 7월 대구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영남신학교에서 전임강사로 임명을 강의하였다.
 
1962년 아주 어려운 노량진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다. 원래 학구적인 목사라 목회에만 전념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명설교가 노량진 일대에 알려지자 노량진교회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할 수 없이 노량진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1966년부터 2부제 예배를 드렸다. 2부제 예배를 드려도 오는 교인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노량진 언덕에 새 성전을 신축하고 1976년 봉헌예배를 드렸다. 1977년에는 1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 숫자는 당시 한강이남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1984년 한국교회100주년 기념대회에서 4대 목사가정으로 수상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그의 선교열정은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한일선교협력회를 조직하고 이 일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1994년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고 지금도 원로목사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김수진목사/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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