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회 신후식ㆍ제56회 방지일 총회장

제55회 신후식ㆍ제56회 방지일 총회장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신후식ㆍ방지일 전총회장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8월 13일(월) 14:58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제 55회 신후식 총회장
 
신후식(신후식, 1903-2010)목사는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부모의 권유로 대구 계성학교에 진학을 했다.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옆에 자리 잡고 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1936년 제29회 졸업생으로 촉망을 받았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37년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계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목으로 재직 중 민족사상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옥고를 치룬 일도 있었다. 해방 후에는 신명여학교를 인수하여 이사회를 조직하고 그 후 중. 고등학교를 분립시키고 대구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70년 총회가 55회를 맞이한 관계로 신후식 총회장은 운좋게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총회에 참석을 하여 축하 인사하는 일로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세계교계 인사들이 총회를 방문했다. WCC 총무인 브레이크 박사를 비롯하여 영국 장로교회 총회 해외 선교부 극동 총무인 엔더슨 박사, 미국연합장로교회 총회 테일러 박사, 미국 남장로교회 총회 놀덮 박사가 방문했다. 이러한 일로 신후식목사는 일약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됐을 뿐만 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위상도 업그레드 되어 세계적인 교회로 급부상 되는 일도 있었다.
 
한편 신후식 목사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대구상명여중학교 설립에도 공이 컸으며,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방문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그 어느 때보다 학교의 환경관리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 일로 자연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로 더욱 자리를 굳혀갔다. 그 후 대구신명여자고등학교는 자연히 일류학교로 발전해 가게 되었고 이 일로 학생들이 그를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경북노회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은 후 대구를 떠나 자녀가 머물러 있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0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제 56회 방지일 총회장
 
방지일(方之日, 1911-현존) 목사는 평북 선천읍에서 방효원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다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3년 과정을 졸업했다. 1931년에는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전대천교회 전도사로 각각 시무했다. 1937년 4월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이미 부친 방효원 목사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역인 중국 산동성으로 파송을 받고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그런데 방지일 선교사가 부임 한지 얼마 안 된 1937년 7월 7일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있을 때 중국 내는 몹시 혼란기에 접어들게 됐다. 1941년 12월 8일 소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제는 곧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였지만 해가 갈수록 일제의 패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으며, 소위 국민당 장개석과 공산당 모택동이 하나가되어 일제와 싸우는데 참여하여 결국 미국이 승리로 이끌고 말았다. 그러나 미군은 곧 통치권을 국민당 장개석 정부에게 이양하였지만 공산당 모택동에게 힘에 밀려 할 수 없이 산동성을 모택동이 통치하게 됐다.
 
그러나 방지일 선교사는 그 일을 장기간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1957년 공산당 정권에 의해 추방 명령을 받고 홍콩을 거쳐 부산항에 도착을 하였다. 그는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국에 돌아온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뜻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서울 영등포교회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목회를 하던 중 1971년 9월 인천제일교회에서 모이는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을 받았다. 비록 총회장으로 선임이 됐지만 영등포교회 만은 성실하게 목회를 하였으며, 한강 이남에서 제일 역사가 깊은 교회답게 교회를 성장시켜왔었다. 은퇴 후에도 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행사시는 예배 축도는 그의 몫이 되었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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