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극단 '소리'

시각장애인 극단 '소리'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시각장애인 극단 회고

최종률장로
2012년 07월 30일(월) 10:58

최종률 장로의 빈방이야기 <28>

시각장애인 극단 '소리'와는 '금관의 예수' 이후에도 '해 돋는 골목길', '유리 동물원', '헬렌, 빛을 잡아라'(원제:The Miracle Worker)와 같은 작품들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모두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주인공이면서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 연극으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장애인 극단이니 오히려 밝은 작품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는 '소리'의 구성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담아내는 공연을 우선으로 하는 데에 뜻을 같이 했다. 공연작품 가운데 특히 헬렌 켈러의 어린 시절을 극화한 'The Miracle Worker'는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이야기였다.
 
연습이 시작되자 '소리'의 모든 배우들은 다른 어느 작품 때보다 더욱 열심을 냈다. 그 중에도 주인공 애니 설리반을 맡은 김 양은 특별했다. 일반 배우들도 부담스러워할 만큼 엄청난 양의 대사를 단 일주일만에 어미는 물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벽하게 외워와 필자를 놀라게 했다.
 
후에 시각장애인 히말라야 원정대에 참가할 정도로 김 양은 열정과 집념이 남달랐지만 연기력 또한 탁월했다. 그래서 '소리'의 거의 모든 공연에서 여주인공 역을 도맡아 했다.
 
'RP(망막색소변성증)'로 진단이 나오자 절망하여 몇 해를 독방에 자신을 밀폐시켰던 그녀에게 연극은 유일한 피난처이자 삶의 이유였으며 자기 확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못 보고, 못 듣고, 말을 못하는 헬렌 켈러에게 사물에는 이름과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고 몸부림치는 애니 역을 맡았으니 얼마나 배역에 집착했을지는 독자들도 짐작하시리라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애니와 헬렌 모두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연습에 임하는 그녀의 자세는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막이 올랐다. 극은 후반으로 접어들고, 여전히 의식의 흑암 속에 갇혀 있는 헬렌에게 애니가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 빛을 잡아라! 그 빛에 닿아라, 헬렌! 난 너한테 가르쳐주고 싶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가득찬 모든 의미들을…!"
 
애니를 연기하던 김 양은 어쩌면 이 절절한 소망의 메시지를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진정성을 가진 그녀의 연기가 관객들을 감동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명동에 있는 중구 문화관에서 '헬렌, 빛을 잡아라'의 마지막 공연이 끝나자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관객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뭐지? 뭐가 잘못된 걸까…?"
 
그날 관객들은 김 양을 위시한 순수 아마추어 시각장애인 배우들의 다소 미숙하지만 그들의 삶이 짙게 붇어난 연기에 깊히 감동되어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여운을 음미하느라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어떤 이는 눈물을 훔치고, 어떤 이는 그냥 하염없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기도하고 있었다.
 
처음 '소리' 단원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돕고 뭔가 베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로부터 많은 소중한 것들을 얻었고 배웠다. 예컨대, 그들의 무쇠같은 인내와 삶을 향한 치열한 의지와 집념 같은 것을.
 
참,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소리' 식구들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회한과 죄책감이 있는데 '유리 동물원' 공연 때의 일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스스럼 없이 대하는 것이 좋다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워 정작은 연출에 과욕을 부리다가 김 모 군에게 그만 모멸감을 느낄 만큼 심한 책망을 하고 말았다. 그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지면을 빌려서 용서를 구한다.
 
또 한 가지. 극단 '소리'와 관련해서 잊지 못할 추억은 헬렌 켈러 역을 했던 승아의 결혼이다. RP 환자였던 그녀의 신랑도 시각장애인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 그 두사람보다 더 행복한 신랑 신부를 본 적이 없다. 지난 호에 고백했듯이 그들이 정말 그립다. '소리' 식구들아, 굳이 연극이 아니더라도 그냥 한번 만나자. 빛바랜 옛 추억으로만 묻어두기엔 우리의 만남이 너무 소중하지 않았었니, 친구들아!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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