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시각장애인 극단 「소리」와 함께하며

소리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시각장애인 극단 「소리」와 함께하며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시각장애인 극단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23일(월) 17:12

최종률 장로의 빈방이야기 <27>

1993년 어느 날, 대학로에서 극장을 경영하면서 연출 작업을 병행하고 있던 대학교 후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시각장애인들의 연극 지도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연극을 하겠다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도전정신이 필자를 자극했다. 성령께서 그들을 돕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주셨다.

며칠 후에 상견례를 가졌는데, 리더는 한때 영화배우로도 유명했던 시각장애인 이 선생이었다. 그들이 모이게 된 사연은 이랬다. 눈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로 미국 유학을 결행했던 이 선생은 점차 떨어지는 시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중도포기하고 귀국한 이 선생은 한국에 자신과 증상이 같은 망막색소변성증(RP)환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어 점차 시력을 잃어가다가 마침내 실명에까지 이르게 되는 절망적인 안질환. 그래서 많은 RP환자들이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실의에 빠진 채 자포자기 상태로 집안에 칩거하게 된다. 그런 현실이 안타까웠던 이 선생은 그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경험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연극을 택했다는 것이다.

극단 명칭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소리'. 눈으로는 못 보는 것들을 소리로 본다는 뜻이리라. 단원으로 모인 사람들은 증상이 진행 중이어서 아직은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시력을 잃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동숭교회에서 연습장소를 제공해 준 덕분에 곧바로 연습에 돌입했다. 작품은 소외계층의 암울한 삶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금관의 예수'로 정했다.

어려움은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배우들이 점자대본으로 대사를 익히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동작 연기가 난관의 연속이었다. 안면근육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의 특징대로 배우들의 표정은 고정돼 있었고, 충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폭은 좁고, 동선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기 일쑤고, 서로 부딪히고, 소품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고….

그렇지만 모두 의지와 각오가 남달랐기에 초반에는 말수가 적었던 연습장 분위기도 갈수록 밝아졌다. 후에 소문을 듣고 자원봉사자들이 스태프로 동참해준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한 일간지에서 취재를 요청해왔고, 얼마 후에 사회면에 극단 '소리'를 소개하는 내용이 톱기사로 실리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로의 소극장 하나를 대관하여 공연에 들어갔다. 시각장애인들이 성한 사람들에게도 버거운 연극에 도전한다는 사실 자체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객석은 초만원이었다. 그런데, 무대에서 총연습을 제대로 못해보고 막을 올리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정확한 무대중앙인지를 가늠하지 못한 배우가 엉뚱한 곳을 향해 성호를 긋더니 앞무대로 나오는 장면에서 급기야 객석으로 추락하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모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두 번째 공연에 앞서, 무대 중앙에 세로로 쫄대를 붙여서 배우들이 발바닥의 감각으로 중점을 잡게 했고, 걸음 숫자로 거리를 계산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맞이한 두 번째 공연. 연극 후반에 주제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맹인 가수가 2절 가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 거리여. 가난의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갑자기 노래가 끊겼다! 가사를 음미해보면 독자들도 짐작하시겠지만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정확하게 묘사한 가사에서 그도 그만 목이 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콘크리트로 굳어 있던 예수님 역의 이 대표와 다른 배우들도, 무대 뒤 스태프들도 눈물을 떨구었고, 조종실에 있던 필자도 뒷벽을 향해 돌아서서 울고 말았다. 그날 공연은 그것으로 족했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연민이 컸겠지만, 극장 현장에서 우리 모두를 훑으며 지나갔던 감동의 전율은 내 마음 깊이 각인돼 있다.

그 후, 극단 '소리'와는 세 번의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뭘 하고 지내는지, 그들이 그립다. 하나님, 저들을 기억하시고 용기와 지혜와 믿음을 주옵소서.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