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노진현 목사, 제44회 이창규 목사

제43회 노진현 목사, 제44회 이창규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제43대,44대 총회장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02일(월) 12:35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제43회 노진현 총회장
 
노진현(盧震鉉,1904-2002)목사는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모의 신앙에 따라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으며,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잠시 봉사를 했다. 이때 교사의 일을 접어두고 도일하여 고베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193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가야마(和歌山)교회에 부임했다. 다시 노진현 목사는 교토(京都)에 있는 한인교회에 부임하려고 하였지만 일제 경찰들의 방해로 부임하지 못하고 오사카 니시라니(西城) 교회에 부임했다. 교토 한인교회는 전인선목사가 시무를 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부산에 일본 메도디스트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때 노진현 목사는 일본으로 귀국해 버린 일본 메도디스트교회를 인수하여 부산 중앙교회 간판을 걸고 목회를 시작했다. 1950년 6ㆍ25 전쟁으로 이북에서 월남했던 목회자 및 교인들이 부산으로 모여 들자 노진현 목사는 부산중앙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여 기도하는 장소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 일로 부산중앙교회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리어지면서 자연히 노진현 목사도 영력이 있는 지도자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노진현 목사는 1958년 9월 제43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때 그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이 일로 1959년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회 될 때 총회장으로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때 경기노회에서 총대가 노회장 이환수 측과 부회장 강신명 목사 측의 총대가 총회 서기부에 각기 제출되었다. 이때 노진현 총회장은 사회를 맡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결국 이환수 목사 측의 총대에게 총대권을 주고 강신명목사 측에게 총대권을 주지 않았다. 이때 부노회장 강신명 측은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측이었으며,노회장 이환수목사 측은 에큐메니칼 반대측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대전 중앙교회에서 모이는 제44회 총회는 끝내 분열되고 말았다.


제44회 이창규 총회장
 
이창규(李昌珪,1886-1982)목사는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하였다. 이창규는 군산선교부의 소속인 부위렴(W. F. Bull)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창규는 농한기에만 실시하는 달성경학교에 진학하여 1개월 가량 교육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중 친구들과 함께 예수님을 믿고 1906년 서천 한산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창규는 한일병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민족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독교뿐이라는 확신을 갖고 전주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성경학교를 졸업했던 이창규는 마로덕 선교구역인 전북 금산지역에 있는 금산읍교회를 비롯해서 순회 조사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그 금산읍교회 근방에 있는 쇠실교회,진산읍교회,수영교회요강원교회,역돌교회,경당리교회 등을 부흥시켰다. 이창규 조사는 노회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으며,모든 과정을 마쳤던 이창규는 1918년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목사안수를 받았던 이창규는 완주군 서두교회와 삼례교회의 두 교회 연합으로 위임청원을 받고 목회를 했고 그에 대한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1922년 익산 후리교회로부터 위임목사 청빙을 받았다. 1924년에는 전북노회 파송으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얼마동안 사역을 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1925년 군산 구암교회에 부임하였다. 군산 구암교회에 부임 했던 이창규 목사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구암교회 내에 구암 유치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엽 일제의 종교정책에 의해 자연히 1938년 9월 총회시 신사참배하는 일에 동의를 하였으며,이 무렵 군산노회장을 맡고 있던 그에게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폐교되었던 두 남녀학교를 재건하고 1948년에는 군산영명중학교 초대 교장직을 맡아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 1959년 9월 총회가 예장통합으로 분열될 때 통합측지지 총대들이 일부 상경하여 서울 연동교회에서 속회를 개회 할 때 총회장으로 선임을 받았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