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이대영 목사, 제42회 전필순 총회장

제41회 이대영 목사, 제42회 전필순 총회장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19일(화) 13:41

 제41회 이대영 목사

 
이대영(李大榮, 1887-1968)목사는 경상북도 예천의 가난한 농촌에서 잘았지만 한문사숙을 다니면서 한학을 통달하였다. 그의 고향에 브르엔(H. N. Bruen, 부혜리)선교사의 전도 강연을 듣고 이대영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믿고 있는 유교가 최고 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훌륭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개종했다. 이 일로 이대영은 가정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고 견딜 수가 없어서 안동에 있는 브르엔 선교사를 찾아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했더니 브르엔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이대영을 안동성경학교에 입학시킨다. 이대영은 성경학교에 입학하고 숙식이 해결되자 그 이상 좋은 일이 없었다. 이 일로 자연히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를 하자 브르엔 선교사 구역인 영일군 홍해교회에 첫 전도사로 부임을 하였다. 다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192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안동교회에서 모이는 가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총회 전도부에서 그를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을 하게 되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부임하였으며, 한학에 능통한지로 필담(筆談)으로 의사를 소통하자 곧 중국어를 유창하게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대영목사는 산동성에 도착을 하자 선교지를 배정받은 다음날부터 중국인 옷으로 갈아입고 중국인과 똑같이 생활을 하면서 청도 등 여러 지방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매년 추수감사절 헌금이 선교비로 보내졌지만 한국교회가 한재를 당하자 그의 선교비를 보낼 수 없어서 철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수많은 중국인들의 영혼을 보고 그냥 떠날 수 없어서 계속 선교는 진행하였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선교는 더 어렵게 되었다. 본국에서는 귀국을 요청했지만 수많은 중국인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버티었고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협력으로 1948년 이대영 선교사는 귀국을 하게 되었으며, 1954년에 서울 승동교회에 부임을 하여 목회를 하던 중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을 받게 되었다.       


 제42회 전필순 총회장

 
전필순(全弼淳, 1897-1977)목사는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한지 얼마 안 되어 장평리에 있는 봉양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1년간 잠업 및 축산 등을 배웠다. 이 무렵 서울 연동교회 원세성과 박용희가 용인 장평리교회에서 전도할 때 이때 전필순은 예수를 믿고 장평리교회에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회선교사인 톰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16년 상경하여 서울 YMCA 소년부 간사로 재직하면서 아현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여 교감까지 승진을 하였다. 1919년 원세성의 추천을 받아 연동교회의 조사로 재직하면서 연동교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같은 3월 1일 3ㆍ1운동의 주역이었던 함태영, 이상재, 박용희, 김마리아 등을 만나 비밀리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출옥하여 1921년부터는 교육 개몽 운동에 힘을 쏟으면서 전도 강연에도 열정을 쏟았다.
 
1922년에는 교역자에 뜻을 두고 도일하여 고베중앙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친 후에 1926년에 연동교회, 묘동교회의 조사로 사역을 하다가 1927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다시 수송교회에 부임을 하였으며, 1939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령회(神靈會)에 관련을 하였다 하여 경기도 경찰부에 60일간이 구금당했던 일도 있었다.
 
1941년 연동교회의 청빙을 받고 위임식을 거행을 사역을 하던 중 1943년 감리교 교단과 합동하여 혁신교단을 만들고 통리가 되었다. 그러나 혁신교단이 곧 와해되고 말았으며, 같은 해 조선 장로교 교단이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면서 통리에 채필근 목사, 부통리에 전필순 목사가 선임되었다. 해방이 되자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친일 부역자로 30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이 되었다. 이러한 일로 연동교회에 사의를 표하였지만 그를 받아 주지 않아 목회를 하던 중 1957년 9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연동교회에서는 그를 원로 목사로 추대를 하였으며, 마지막 여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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