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사건들 III - 두 번의 배우 실종사건

잊지 못할 사건들 III - 두 번의 배우 실종사건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빈 방 이야기 <20>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01일(금) 16:21

꽃나무에 비유컨대 극작가가 뿌리이고 스태프들이 줄기와 잎이며 연출가가 물을 주는 정원사라면 배우는 연극의 꽃이다. 연극은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무대 위에 압축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 위에 실시간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배우만 주목하게 된다.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배우도 하나의 도구요 수단일 수도 있지만, 결국 관객은 배우를 통해서 극예술을 이해하고 감동한다. 이처럼 배우는 연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부지런히 기량을 향상시키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텍스트를 연구 분석하며 역사, 철학, 심리학, 고전문학의 책 읽기 등으로 지적인 깊이를 더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게으른 배우는 도태될 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배우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상상력(imagination), 근면성(industry), 지적 능력(intelligency) 등 '3I'를 꼽기도 한다. 그런 뜻에서 배우는 연극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인 것이다.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교감하며 연극의 꽃으로 아름다움과 향기를 발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필자도 때로는 배우로, 때로는 연출자로 여러 공연에서 여러 배우들을 만나왔고, 그 모든 만남을 통해 인간과 삶을 배우고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배우에 관한 특별한 추억담을 들려드리려 한다.
 
껌팔이 할머니의 무대 난입사건이 있던 해 성탄절 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휴일이라 두 번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낮 공연 때 개막시간이 다 되도록 여배우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통화도 안 되고, 그렇다고 집으로 찾아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연출자로 용단을 내려야 했다. 고심 끝에 극장 입구에서 티케팅을 담당하고 있던 30대 중반의 스태프에게 급히 분장을 시키고 10대 역할의 배우로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다행히 과거에 배우를 했던 분이고 대사를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라도 공연을 살릴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공연 때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은 채 드디어 극장에 나타난 문제의 여배우. 낮 공연의 증발 이유가 기막혔다. 전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의 청년부 행사에서 철야를 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골아 떨어졌는데 깨고 보니 저녁시간이 다 됐더라는 것이다. 오, 마이 갓!
 
창작 뮤지컬 'He'를 공연할 때의 일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에 마귀의 졸개 중 하나로 출연했던 배우가 이어지는 산상수훈 장면에서는 제자 중 한명으로 변신해야 했는데, 조명이 들어왔는데도 무슨 영문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갔나? 열 두 제자역의 배우들이 수군거리고 있는 중에 이마로, 팔로 무슨 액체가 계속 떨어졌다. 천정을 올려다본 순간 그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증발했던 바로 그 배우가 무대 천정까지 올라가 있는 철골 구조물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땀을 떨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 장면에서 구조물에 붙어 있던 귀신들이 조명이 꺼질 때 뛰어내리기로 약속했었는데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구조물과 함께 들려 올라가버린 것이다. 그날 극장 천정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뜨거운 조명의 복사열을 고스란히 쬐이며 십여 분간 홀로 허공에 매달린 채 그 배우가 느꼈을 공포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생애 가운데 가장 필사적으로 기도하지 않았을까.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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