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2), 제34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3)

제33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2), 제34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3)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5월 22일(화) 10:54
 제33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2)
 
이자익 목사는 제13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기에 1924년 총회장이 당선이 되어 회무 처리하는 일까지만 기록을 남기겠다. 총회장이 끝나자 잠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교회를 시무하가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 요청에 의해 1925년 이명서 없이 가족을 이끌고 경상남도 거창 선교부 선교사로 활동을 하게 됐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사건은 총회적으로 이름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해결 할 수 있는 적임자는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하여 거창 선교부에서는 순회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어려운 교회만 찾아다니는 일을 맡아 왔었다. 
 
그렇게 극심한 분규로 어지러웠던 마산 문창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총회장을 역임했던 함태영 목사가 부임하여 잘 해결됐으며, 주기철 목사의 모 교회인 웅천교회는 6년 간이나 분규되어 따로 예배를 드렸던 사건이 이자익 목사의 중재로 잘 해결을 보게 됐다. 때마침 함태영 목사가 경남노회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을 하자 안정을 돼 찾아갔었다. 이자익 목사는 함태영 목사의 지도력에 놀라 그를 1929년 6월 제26회 경남노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1936년 9월 30일 거창을 떠나 금산교회와 원평교회에 부임을 하였다.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장 배은희 목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이 때 임원을 선거하는 데 그 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물들지 않고 참신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모든 총대원들이 금산교회 동사 목사로 재직 중인 이자익 목사를 제33회 총회의 수장으로 선출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뜻하지 않게 조선신학교 51명 재학생들이 진정서를 총대원들에게 배포한 일이 있었다. 내용은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학이 문제였다. 이때 이 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지 말고 7인위원회를 선임하여 진정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김재준 교수와의 면담을 요청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기로 하였다. 바로 이 어려운 일을 해결할 사람은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그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동안 남부 재건 총회를 32회로 회수를 고치고 역시 남부 총회는 33회로 회수를 바꾸기로 하였다.
 

 제34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3)
 
이자익 목사는 1947년 제33회 총회 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요청한 대전 선교부 개설을 허가를 하자 이자익 목사를 미국 남장로교 소속 목사로서 대전에 남장로교 선교부 개설을 위해서 대전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이미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대전이 교통의 중심지이고 충남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만들려면 대전에 선교부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자 대전시 삼성동 387번지에 있는 일본인 가옥 30평을 적산 가옥으로 인수를 받고 이곳에 이자익 목사가 자리를 잡았다. 이 일을 위해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이열 선교사와 인돈 선교사가 이곳에 파송을 받고 삼성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전주를 오고가면서 대전 선교부 신설에 온갖 힘을 쏟았다. 충남 노회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려면 1950년 4월 6일 대전시 삼성동 이자익 목사 사택에서 충남고등성경학교를 출발시켰다. 교장은 보이열 선교사, 이자익 목사를 부교장으로 선출하고 학사업무를 맡기었다. 학생을 모집하여 개학한지 얼마 안 되어 뜻하지 6. 25 전쟁을 만났다.
 
이자익 목사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전북 완주에 대흥사로 피난을 하였다. 때마침 인민군들이 이를 알고 이자익 목사를 체포하여 김제 내무서로 이첩을 시키었다. 마치 셋째 아들 이성환이가 그 지역에서 인심을 많이 얻었기에 자신의 집에 거처를 지낸 후에 9ㆍ28을 만나자 다시 대전으로 가게 됐다. 다시 대전 고등성경학교를 개강 한 후 졸업생이 생겨나자 이들이 진로가 걱정이었다. 졸업할 무렵 이미 이자익 목사는 대전노회에서 지방 신학교를 통하여 교역자를 양성한다면서 야간 대전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1954년 8월 25일 이사회에서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문을 열었다. 교장 이자익 목사는 개인의 사정으로 취임한지 얼마 안된 1954년 12월 7일자로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김제 원평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이자익 목사가 설립했던 대전신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받고 대전신학대학교로 크게 발전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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