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사건들I - 복덕방 아저씨와 껌팔이 할머니

잊지 못할 사건들I - 복덕방 아저씨와 껌팔이 할머니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빈방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5월 15일(화) 15:06
그러는 사이 '빈 방'의 연속공연도 어느덧 10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전용극장 같은 호사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어서 해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으레 공연할 극장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문자 그대로 '빈 방' 공연을 위해 빈 방을 찾아다니는 형국이었다. 만삭의 마리아를 부축한 채 애타게 빈방을 찾았을 요셉의 처지가 잘 이해됐다.
 
어느 해인가 서대문에 있는 '민중'소극장을 겨우 빌렸는데, 그 마저도 민중극단에서 자체 공연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시간대만 어긋나게 하여 무대를 공유하는 악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같은 무대에서 두 작품이 오후와 저녁으로 나뉘어 공연되다 보니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무엇보다 극장이 큰 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꼬불꼬불 골목을 좌회전했다 우회전하기를 여러번 반복해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것이 힘들었다.
 
궁리 끝에 여분의 포스터에서 제목과 장소 부분을 화살표 모양으로 잘라내어 서대문 네거리부터 극장까지의 경로를 따라 길바닥에 붙여서 관객을 유도했다. 그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갑자기 사무실 밖이 소란해져서 나가봤더니 50대 후반 좀 되어보이는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정말 나한테 이럴 수 있는거야? 해도 너무 하는구만!" 민중극단 단원이 놀래서 달려나왔다. "무슨 일인데요, 아저씨?" 남자는 길바닥에서 뜯어낸 화살표 표지를 흔들며 계속 악을 썼다. "이거 뭐야? 빈 방 있습니까, 민중소극장?"
 
내용인 즉, 과거 민중극단에 극장 건물을 소개했던 복덕방 아저씨가 화살표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고는 자기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극장을 옮기려는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오해는 이내 풀렸지만 돌이켜보면 한바탕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혜화동 로터리 부근의 '한마당'이라는 소극장에서 공연할 때의 사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 입구 쪽에서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필자가 첫 해설을 마치고 무대를 나와 있던 참이어서 얼른 뛰어올라갔더니 껌팔이 할머니 한 분이 제지하는 단원을 뿌리치며 한사코 극장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옥신각신하고 계셨다.
 
겨우 설득을 시킨 다음 무대로 복귀해서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대본에도 없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무대로 불쑥 들어왔다. 조금 전의 껌팔이 할머니였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둘러보던 할머니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더니 말릴 새도 없이 대사를 쏟아냈다.
 
"많이 모였네! 껌 좀 팔아줘." 정면돌파가 불가능해지자 할머니가 극장 뒤 비상구를 통해 분장실을 거쳐 무대로 난입하신 것이다. 배우들은 모두 공황상태가 됐다. 잠시 후 남학생2 역을 맡았던 배우가 순발력을 발휘했다. "얘들아, 할머니 도와드리고 올께"하면서 할머니를 급히 무대 밖으로 모시고 나간 것.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의지의 한국인'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할머니에게서 대목의 기회를 빼앗은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필자의 생각이지만, 그날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그 사건을 연극의 한 부분으로 여겼을 것이다. 더 이상 리얼할 수가 없는 명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최종률장로/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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