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1939-1940), 제28회 총회장 윤하영 목사(1939-1940)

제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1939-1940), 제28회 총회장 윤하영 목사(1939-1940)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23일(월) 09:47

 제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1939-1940)
 
홍택기(洪澤麒, ?-1950) 목사는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선천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설치되었으며, 홍택기도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3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이후 3년의 과정을 이수하고 1925년 졸업(18회)을 하였다.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홍택기 목사는 총회 임원을 1929년 제18회 총회부터 회록서기로 발을 내 딛기 시작하였다. 1930년 제19회 총회부터는 서기로 활동하면서 총회임원을 7년간 활동을 하였다. 드디어 1938년 9월 평양 서문교회에서 개회하는 제27회 총회에서 홍택기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웅률 목사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 안건을 채용하기로 가결을 하였다. 
 
"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違反하지 않는 本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에 神社參拜를 率先勵行하고 追히 國民精神總動員에 參加하여 非常時局下에서 銃後 皇國臣民으로써 赤誠을 다 하기로 期함. 昭和 13年 9月 10日 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長 洪澤麒"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서기는 즉시 이를 낭독하였으나 회의장은 수라장에 가까울 정도로 대 혼란이 야기됐다. 신사참배가 결의되자 부회장인 김길창 목사는 임원회를 대표하고 각 노회장들은 노회원을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를 하였다. 이러한 결의로 인하여 4개 선교부와는 모두 단절을 하였다. 이때 총회는 일제의 전쟁 승리를 위해서 국방헌금을 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홍택기 목사는 철저하게 변질된 모습으로 총회를 이끌고 갔었으며, 해방 후 5도 16개 노회 연합회 주최로 퇴수회를 행하였다. 이때 강사로 나왔던 이기선 목사의 간증은 참석자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북한교회 수습방안이 대두되자 만주신학교에의 교수로 재직했던 박형룡 박사가 그 안을 내 놓자 홍택기 목사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은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변명만 늘어놓았다. 결국 6ㆍ25 한국전쟁으로 숙청을 당하였다.

 제28회 총회장 윤하영 목사(1939-1940)
 
윤하영(尹河英, 1889-1956) 목사는 평북 의주군 광명에서 윤연석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8년 선천 주재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램프(H. W. Lampe, 남행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접하게 됐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어학교사 겸 조사가 되면서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때마침 선천 성경학원이 문을 열자 이 학원에서 3년 간 수학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ㆍ1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의주군 광명으로 돌아가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간 평양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다시 신학교에 복학하여 1921년 6월에 졸업(14회)을 하고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4년에는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을 하여 3년간의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1929년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임을 하였다. 1939년 9월 신의주 제2교회에서 제29회 총회가 개회됐다. 이때 윤하영 목사는 총회장으로 선임됐으며, 9월 11일 윤하영 총회장 지도 하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식순은 궁성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의 서사제창, 찬송가, 기도, 성서봉독, 취지, 서약, 선언, 내빈축사 등으로 진행됐다. 1941년 12월 8일 미ㆍ일 전쟁인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제는 윤하영 목사를 즉시 체포해 갔으며, 석방 후 신의주에서 그리 멀지 않는 백마라는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곧 신의주 제1교회에 목사로 복직을 하는 한편 1945년 9월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을 하였다.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개혁운동에 힘을 쏟으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로 이 운동은 좌절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북에 머물 수가 없어서 1947년 월남하여 충북지사로 잠시 제직을 하면서 6ㆍ25 전쟁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극동사령부 미국 공보요원으로 근무를 하면서 일본 가와자끼(川崎)교회 설교목사로 잠시 시무한 일도 있었다. 귀국하여 문교부 교과서 편수관과 함께 기독교 개명협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운동을 하다가 심장병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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