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총회장 이승길 목사(1936-937), 제26회 총회장 이문주 목사(1937-1938)

제25회 총회장 이승길 목사(1936-937), 제26회 총회장 이문주 목사(1937-1938)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16일(월) 16:02
 제25회 총회장 이승길 목사(1936-937)
 
이승길(李承吉. 1887-1965) 목사는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이길함(G. Lee) 선교사에 의해 고향에서 복음을 받고 가족과 함께 기독교를 접하였다.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 중등과에 진학을 하여 1905년 졸업을 하고 광성초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1908년 김구 등과 함께 해서(海西)교육총회를 설립하였으며 이 기관을 통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1910년 이른바 안명근 사건으로 연루되어 1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중 7년 후에 출감을 하였다. 그후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고 1924년 졸업(17회)를 하였다. 그 해 12월 황해도 장연읍교회의 청빙으로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0년 간 시무를 하였다. 1936년 9월에 전남 광주 양림교회에서 제25회 총회가 개회되자 이승길 목사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로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폐교를 시키고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이때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면서 친일적인 평양신학교 설립에 앞장서기도하였다. 이승길 목사는 1940년부터 겸이포 중앙교회에서 시무를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마음놓고 목회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이승길 목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을 하였다. 서울에 정착을 하고 뜻있는 동지를 규합하여 토마스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 받아 선교를 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 '토마스 목사 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회장의 직책을 맡아 서해 앞 바다에 널려 있는 옹진, 연백, 백령도 등을 다니면서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 특별히 고향에서 월남한 황해도 출신들 목사를 모아 황남노회를 조직하고 월남에서는 초대 노회장의 기록을 갖게 됐다. 6ㆍ25 전쟁 중에는 잠시 피난을 갔다가 수복 후 인천 제1교회에서 교인 일부를 분립하여 1951년 인천 제2교회를 창설 하였으며,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제26회 총회장 이문주 목사(1937-1938)
 
이문주(李文主, 1884-1945) 목사는 경남 합천에서 출생 하였다. 경남 합천은 산골이지만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합천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하여 달(月)성경학교를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의 열심에 놀란 선교사들은 그를 그냥 놔둘 수 없어서 호주 장로회 선교회의 추천으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1918년에 졸업(제11회)을 하였다. 그 해 가을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달성군 점산교회, 상주읍교회를 거쳐 1924년 3월 대구 남산교회를 시무하면서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리어지게 됐다.
 
1937년 9월 대구 제일교회에서 모이는 총회에서 제26대 총회장으로 회의 진행 중 정인과는 종교교육부 총무로 배민수 목사는 농촌부 상임 총무로 각각 사역을 하였지만 배민수 목사의 사임으로 농촌부가 폐지되는 일까지 있었다. 총무로 재직 중이던 배민수 목사는 사임이 되자 배민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삼애(三愛^하나님을 사랑, 땅을 사랑, 생명을 사랑)운동으로 전환하면서 농촌지도자들을 계속 배출하였다.
 
특별히 이문주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되던 그 해는 일본의 종교정책 및 식민지 정책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1937년 7월 7일을 기해 중일전쟁으로 일으키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부르짖으면서 아세아는 아세아인이 대동단결하여 서양제국의 모든 나라를 몰아 낸다 면서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한국에는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이미 일제는 각 종 미선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장로교 모든 미선학교는 자진 폐쇄를 하였다. 여기에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는 자신 해산을 단행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 총독부에서는 한국의 모든 교육기관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일을 금지하도록 하여 자연히 교회 내에까지 이 영향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총회장을 담당했던 이문주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몇 개월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목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