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1934-1935), 제24회 총회장 정인과 목사(1935-1936)

제23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1934-1935), 제24회 총회장 정인과 목사(1935-1936)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09일(월) 10:50

제23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1934-1935)
 
이인식(李仁植, 1889-1950)목사는 한국 장로교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는 희년의 해인 1932년 9월 제2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총회장으로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하는 이인식 목사는 그 어느 해 보다도 가장 의미 있는 해를 맞이했다.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인 알렌(H. N. Allen)이 인천에 첫 상륙을 하자 알렌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의 선두 주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이했던 총회는 희년의 해를 맞이하고 준비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총회 장소가 모였던 평양 서문밖교회 정문에 祝 '第23回 朝鮮예수敎長老會 總會場' 그 밑에는 '1934년 9월 7일 ~ 14일'이란 글씨가 있었으며, 오른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와 외쪽에는 '祝 五十週年禧年'큰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희년을 맞이하자 외국에서 축하객으로 여러 교단 지도자들이 참석을 하여 축사를 하였다. 필리핀 복음교회 리오펜도 목사, 캐나다 연합교회 대표인 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박사,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 대표로 맥카피 박사가 역시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회의 기간 중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박사의 희년 기념 강연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를 하였다. 2일이 지난 9월 9일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운동장에 2만여 명이 모여 암스트롱 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희년의 행사는 1934년 10월 9일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희년기념음악회, 평양시내 연합찬양대의 합창단, 숭의여학교 찬양대, 숭실전문학교의 취주악단의 순서가 있었다. 특별히 총회에서는 희년을 맞이하여 1873년부터 만주에서 활동했던 스코트랜드 로스 선교사의 성서변역에 대한 역사를 잘 정돈하여 모든 총대원은 물론 평양지방 근방에 있는 여러 교회 교인들이 관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희년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냈던 이인식 목사는 해방이 되자 북한으로 복귀하여 북한교회 재건에 힘을 쏟다가 6. 25전쟁을 만나 생을 마감하였다.

 
제24회 총회장 정인과 목사(1935-1936)
 
정인과(鄭仁果, 1890-1972) 목사는 평북 순천 출신으로서 일찍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하여 3년간의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다시 뉴욕대학에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였다. 정인과 목사에 대한 평가가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 다녔던 사람으로 좋은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 될 때 미국의 대표로 임시정부 의정원(국회) 의원으로 교통위원장과 임정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정인과 목사는 1933년 총회 안에 상설 부서인 농촌부와 종교교육부가 출발하자 종교교육부 총무는 정인과 목사가 맡았다. 1935년 9월 제24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때 정인과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정인과 목사는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 재직하면서 총회장으로 선임됐으며, 이러한 일은 유일하게 정인과 총무 때만 있었던 일이었다.
 
1937년 총무직을 사임하였으며, 이때가 바로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해이다. 이후 그의 행적은 과거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외무부 차장 등을 역임했던 과거사를 접어 두고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밟아가고 있다. 1938년 9월 제27회 총회 시 신사참배를 결의를 하고 이어 일제는 창시개명,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 제도를 만들고 나선다.
 
이때 정인과 목사는 그의 이름을 창씨개명 하여 정인과를 도꾸가와(德川仁果)로 개명했다. 1942년 10월 제31회 총회에서 총회 내에 '國民總力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聯盟(이하 연맹)'을 조직하고 이사장에 최지화(鐵原志化), 실무자인 총간사는 정인과(德川仁果) 목사가 맡아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승리를 위해서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발행했던 신편찬송가 중 일제의 천황에 대치되는 가사는 모두 먹물로 지워야 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일본이 패망을 하자 정인과 목사가 설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는 경기도 파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