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총회장 홍종필 목사, 제20회 총회장 장규명 목사

제19회 총회장 홍종필 목사, 제20회 총회장 장규명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3월 12일(월) 14:26

제19회 총회장 홍종필 목사(1930-1931)
 
홍종필(洪鍾弼,1887-1935) 목사는 강원도 평해에서 홍재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한양에서 진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홍종필은 1907년 한성측량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자 그의 사촌 형인 홍종익과 함께 낙향하여 전북 익산군 웅포에 자리를 잡고 농토를 일구어 가면서 생활을 하였다. 1년에 500석의 쌀농사를 지은 부농으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곧 군산이 개항된 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 뜻하지 않게 군산에서 최흥서 조사를 만나 예수의 복음을 받고 형제가 한꺼번에 군산 개복교회에 등록을 하였다. 두 형제는 재력가였기에 개복교회 신축하는 데 건축 헌금을 절반 이상 부담을 할 정도로 개복교회의 기둥 적인 역할을 하였다. 홍종필은 양석주와 함께 2대 장로가 됐다.
 
홍종필 장로는 1923년 신학교를 졸업하자 개복교회의 청빙으로 모 교회에서 목사로서 사역을 담당하였다. 그 후 그는 김필수 목사의 후광을 받고 젊은 나이었지만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총회 임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외에도 장감연합공의회 이사,'基督申報' 이사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편집위원,금강산기독교수양관건축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9월 홍종필 목사는 43세의 젊은 나이로 제19회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총회장으로 사회를 맡았던 홍종필 목사는 회원들의 어려운 질문을 잘 받아넘기었다. 장로가 안수 및 축복기도를 못하는 이유에 대한 회원의 질문을 받았던 총회장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목사는 사도들이 행한 특권을 전수하였기에 안수나 축복기도는 할 수 있으나 장로는 할수 없다"는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대답을 하였다. 제19회 총회에서는 매년 3월 마지막 주일을 신학교 주일로 지키도록,10월 셋째 주일을 농촌주일로 지키도록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홍종필 목사는 더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었지만 1935년 5월 29일 갑자기 별세하고 말았다. 전북노회에서는 그의 죽음이 너무 애석하여 전북노회록 제 30회 회록에 그의 약력을 소개를 하였다. "先生은 天性이 沈眞하시고 言少遠念하사 眞理를 敬愛함으로 一般信者에 模本이 되시었다."

 
제20회 총회장 장규명 목사(1931-1932)
 
장규명(張奎明,1891-1950)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용천 군내에 최초로 신창교회와 동문외교회를 설립되면서 이 지역에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용천지역에 교회가 발전해 나가자 가까운 선천 선교부 위대모 선교사가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장규명도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성학교 보통과 고등과 과정을 1912년을 3월에 졸업을 하자 곧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자 선천 선교부 위대모 선교사의 배려로 선천북교회 조사로 사역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학비문제는 어려움 없이 해결됐으며,평양과는 그리 멀지 않았기에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선천북교회에서 주일이면 예배를 인도하고 예배가 끝나면 평양에 돌아와 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 하였다. 1923년 12월 19일 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실시하는 졸업식에 참가하여 5년 과정의 전 과정을 이수했던 33명 가운데 끼어 졸업장을 받았다.
 
선천북교회에서는 그의 설교의 능력뿐 만 아니라 그의 영력의 힘에 이끌림을 받았던 교인들은 곧 바로 담임목사로 청빙을 하자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계속해서 선천북교회에서 시무를 하였다. 이때 선천북교회의 배려로 일본 고베(神戶)중앙신학교에 1년 간 연구생활을 하였다. 1년 만에 귀국하였다. 1930년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가 됐다.
 
양전백 목사는 그의 목회 자질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 교인 일부를 장규명 목사가 개척하는 교회에 협력토록 하여 어느 세 선천중앙교회도 선천북교회에지지 않을 정도로 급성장 하게 됐다. 이러한 소식이 매년 총회 시마다 장규명 목사의 평가가 올라가자 1931년 9월 제20회 총회가 금강산 온정리에 신축했던 기독교수양관에서 개회 되고 장규명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총회장 직무를 잘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회도 성공적으로 이끌고 왔었지만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만나자 공산 정권하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김수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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