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1백주년] 총회 1백주년 맞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명암

[총회1백주년] 총회 1백주년 맞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명암

[ 총회1백주년 ]

안교성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8일(화) 17:30
 한국교회 십자가의 신학보다 영광의 신학에 익숙
 명암 통해 주님만 드러낼 '명작' 되는 개혁 필요

한국장로교회 총회 1백주년을 몇 달,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1년 남짓 앞두고 있다. 이를 앞둔 한국교회, 특히 본교단은 기뻐만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무엇을 보고, 보여주려고 하는가? 한국교회는 성공신화에 집착하려는지, 혹은 현실을 직시하려는지? 갈림길에 선 한국교회의 명암을 들여다보자.
 
1. 교회 성장의 명암: 성장인가, 확장인가?
 
미국에 바이블 벨트(Bible Belt)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강 바이블 벨트(Han River Bible Belt, 필자의 조어)가 있다. 해방 전 서북지방에 기독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면, 20세기 후반 한국교회는 급성장했고, 한강 유역에 세계 50대 교회의 상당수가 위치함으로, 서울은 세계적인 기독교인 집중지역이 되었다. 불과 1백년만에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가 되었다. 2010년 전반에는 개신교인이 5대 지도자(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검찰청장) 자리를 차지했고, 지금도 대동소이하다. 그레이슨(J. H. Grayson)은 한국에 특정 종교, 즉 불교, 유교 등이 차례로 주류 종교가 되었는데, 과연 20세기에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될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런 눈부신 성장에도 그늘이 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성장 자체의 진정성이 문제시되고 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성장지상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 성장을 지상목표로 하는 과정에서 노출되는 비윤리성, 경쟁, 빈부격차 등으로 인하여, 서로의 성공을 축하하는 성장보다 상생이 불가능한 확장의 양태를 나타냈다. 더구나 실종된 차세대로 인하여, 한국교회를 주도한 성장 패러다임이 위협받는다. 차세대 문제를 상술하면, 지도력의 노령화, 중간지도층의 지도력 소외, 세대 간의 불통, 젊은 층의 급속한 위축과 이에 따른 교회학교의 붕괴 등이다. 또한 성장지상주의의 결과물인 대형교회의 양가성도 주목된다. 대형교회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과연 대형교회가 온전한 목회구조인지? 유독 대형교회가 많은 한국인데, 이것이 한국교회의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2. 교회 위상의 명암: 머릿돌인가, 걸림돌인가?
 
기독교는 한국종교 중에 후발주자였지만, 특히 사회적 역할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정착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중복되었고, 따라서 한국교회는 민족사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개화운동, 독립운동, 특히 3ㆍ1독립운동, 나아가 대한민국 건국 등에서 보여준 참여와 지도력을 통하여, 기독교는 애국종교, 사회의 지도적인 종교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에 그림자가 드려지고 있다. 먼저 한국교회의 사회적 지도력이 도전받고 있다. 한국교회는 섬김의 지도력을 보이는 민족의 벗이라기보다 한국사회를 위협하는 이익집단으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소수자였지만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다수가 되면서 주변화 되고 있다. 더구나, 기독교는 오늘날 다종교사회라는 국가적 맥락과 종교시장이라는 종교적 맥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한국교회는 전래 초기부터 한국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바랬는데, 대한민국은 국교가 가능하지도 않고, 미국처럼 기독교가 우세한 사회도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기독교국가 신화의 열망을 지양하고, 개인의 도덕성이 곧 사회의 도덕성을 가져온다는 순진한 사회변혁론도 넘어설 시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가 후발주자로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제한된 수준이나마 종교관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종교시장에서 종교갈등 대신, 자신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당당하게 탁월성을 드러낼 것을 요청받고 있다.
 
3. 교회 선교의 명암: 선(宣)교인가, 승(勝)교인가?
 
한국교회는 두 가지 면에서 선교적 교회로서 칭찬받아왔다. 민족교회 설립부터 이미 선교에 동참함으로써 자전, 자립, 자치하는 교회를 넘어, 자선교(self-missionizing)하는 교회가 되었고, 최근 들어 선교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선교사 수가 1979년 1백명을 넘어선 이래 한 세대만인 2009년 2만 명을 넘어섬으로써, 한국교회는 선교적 자신감에 충만하다. 일부 선교학자는 한국교회가 선교적 메시아니즘을 보인다는 평가까지 하고 있다. 즉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대한 막중한 혹은 지나친 책임감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이런 칭찬의 이면에는 어두운 구석도 있다. 한국선교의 대표적인 문제는 내적으로는 개인주의이고, 외적으로는 성과주의와 일방적 자세를 들 수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대국을 표방하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고, 한국교회의 병폐가 한국선교에 답습된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성과주의와 관련하여, 선교거품론이 일고 있다. 또한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교회를 재생산하는데, 성숙한 교회가 성숙한 선교를 할 수 있고, 성숙한 선교를 통하여 새로운 성숙한 교회가 탄생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토착화가 아직 진행 중인 젊은 교회로서, 선교지에서 다른 교회의 토착화를 돕는 이중적인 토착화 작업을 감당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완성된 교회인양 일방적으로 한국교회를 수출해서도 안 되고, 선교지 현장에서 제2의 서구교회인양 선교사 온정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모든 선교에서 조바심도 노파심도 금물이다.
 
주님의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기독교인의 길도, 교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돌이켜보건대, 한국교회는 어느새 십자가의 신학보다 영광의 신학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렘브란트는 명암을 이용하여 기독교의 주제를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위에서 한국교회의 명암을 살펴보았다. 이 땅에서 어둠이 없고 밝음만 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명암을 통하여, 주님만을 드러낼 명작이 되도록 한국교회를 다시 개혁하느냐이다.

안교성교수/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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