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장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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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8일(화) 15:32

제15회 총회장 김석창 목사(1926-1927)
 
김석창(金錫昌, 1876-1950)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토를 일구어 가면서 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에는 전 가족이 선천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미 선천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때마침 선천 선교부에서 선교에 힘을 쏟고 있는 위대모(N. C. Whitmore)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 길로 부모와 함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선천읍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이후 교역에 뜻을 두고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 제4회 졸업을 하였으며, 목사안수를 받고 선천 남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이미 청년시절부터 민족심이 강했던 김석창 목사는 때마침 1919년 3ㆍ1 독립운동을 비밀리 진행되고 있을 때 신성학교 교사이면서 남교회 교인이었던 홍성익, 김지웅, 양준병 등과 함께 의논하여 선천은 신성학교와 보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선천지방에서도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주동자를 색출하는 일본경찰에 평소 사상을 의심했던 김석창 목사를 주목하고 그를 구속하고 그와 함께 모의했던 교사들까지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1920년 4월에는 신성학교 출신인 박치의에 의해 선천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다. 이때도 일제는 김석창 목사가 연계됐다하며, 옥고를 치려야 하는 비극을 만나게 됐다. 김석창 목사가 석방이 되던 그 해 평북노회장으로 피선되면서 두 번째 노회장이 됐다. 이어서 1926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이는 제15회 총회에서 김석창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일제 말엽에는 일제의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목회를 하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자 선천 남교회 원로 목사로 추대됐다 1946년에는 성역 40주년 기념 표창도 받았다.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공산당에게 폭행을 당하였지만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를 해주고 가족들과 동료들의 월남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가족들만 월남시키고 자신은 북한땅을 지키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곧 공산당에 의해 처형을 당하였으며,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제16회 총회장 김영훈 목사(1927-1928)
 
김영훈(金英勳, 1898-1939)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을 하였다. 의주지방은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여 개회된 청년들이 많았다. 더욱이 이조시대의 벼슬을 역임하고 있던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훈으로서는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던 일은 용의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김영훈의 절친한 친구인 김관근은 이웃에 사는 죽마고우였다. 김관근은 사도행전에 나온 바울의 개종 사건을 이야기하자 여기에 그만 그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김관근의 인도함을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됐으며, 후에 교역에 뜻을 두고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김영훈 조사는 드디어 1913년 6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에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총회 창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최초로 박태로, 사병순 목사와 함께 선교사로 떠나게 됐다. 가족과 함께 진남포에서 중국 산동성 연태로 떠나는 배를 타고 한국교회로서는 외국에 최초로 선교사로 떠나는 이들에게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친필을 들고 총회 임원들과 평양 교회 교인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떠나게 됐다. 이미 약속이 되었기에 연태까지 마중을 나왔던 중국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중국 산동성에 선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한문에 대해서는 익숙하였기에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4년간의 약속을 하고 갔던 김영훈 선교사는 어느덧 그 기간이 끝나게 됐다. 1917년 의산노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를 도우면서 의주지방 3ㆍ1운동에 참여를 하였다. 잠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를 하다가 다시 의산노회에서 사역을 하였다. 이미 그의 이름은 총회적으로 알리어졌던 관계로 1927년 9월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총회가 모일 때 제16회 총회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그가 총회장으로 회의를 진행 할 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토록 허락하였으며, 목사만 있고 장로가 없으면 당회는 폐지시키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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