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총회장 김성택목사, 제12회 총회장 함태영목사

제11회 총회장 김성택목사, 제12회 총회장 함태영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2012년 02월 13일(월) 14:26

제11회 총회장 김성택 목사(1922-1923)
 
김성택(金聖鐸,1875-1939)목사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평양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뜻하지 않게 마포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는 한석진 일행을 만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집에 돌아왔지만 자꾸 꿈에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음성을 듣고 그만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했던 장대현교회에 출석하여 26세에 세례를 받고 그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를 하였다. 31세가 되던 때에 장로가 됐다는 사실에 모두들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지만 그는 그만큼 집사의 직을 성실하게 감당했던 결과였다.
 
1922년 김성택 목사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1922년 9월 10일부터 15일 까지 서울 승동교회에 제11회 총회가 이기풍 총회장의 개회설교로 총회가 개회됐다. 이날 참석했던 총대 수는 목사 70명,장로 총대 70명(1명 불참),선교사 총대 31명이 었다. 그가 총회장으로 당선되던 그 날 축하 사절단 일원으로 만국 주일학교연합회 회장 피어스 박사가 와서 축사를 하였다. 전국의 교회가 성장함으로 총대인원을 제한하기 위해서 5당회에서 총대 목사 장로 각 1명씩 하던 일을 10개 당회로 개정을 하였다. 또 전남노회에서 순천노회를 분립토록 허락을 하였으며,총회로부터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최관휼 목사가 그만 러시아 정교회로 이적해 갔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최관휼 목사가 10년 만에 뉘우치고 다시 본 교단으로 복귀하자 만장일치로 그를 받아준 일도 있었다.
 
김성택 총회장이 재임하는 기간 미국 시카코에 있는 맥코믹 여사의 희사금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신축하는 일도 있었으며,또 만국주일학교 탐슨 박사가 내한하여 주일학교 진흥을 위해 전주 신흥학교에서 주일학교 전국 진흥대회를 개최하여 지방교회로 하여금 주일학교운동에 큰 자극을 주기도 하였다. 총회장 임기를 무사히 마친 김성택 목사는 1923년 진남포 비석리교회에서 시무를 하였으며,1934년에는 같은 지역인 억이기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1939년 은퇴 후 안주노회로부터 공로목사로 추대를 받고 삶을 마감하였다.
 


 

제12회 총회장 함태영 목사(1923-1924)
 
함태영(咸台永,1873-1964)목사는 일제 말엽에는 경기 광주지방에서 시골교회를 돌보면서 목회를 하였다. 뜻하지 않게 해방을 맞이했던 그는 조선신학원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선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미군정 관제국장으로 재직 중인 남궁혁 목사를 통해서 서울 역 앞에 있는 일본 천리교 조선교구 본부 건물과 경성교구 본부를 각각 인수를 하였다. 6. 25 전쟁 시 부산으로 피난 갔던 함태영은 1953년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역임하였으며,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후보가 되어 부통령이 됐다.
 
이처럼 경력이 화려했던 함태영은 함경북도 무산에서 함우택의 자녀로 출생하였다. 상경하여 구한말 한성법관양성소에서 법률학을 공부를 하고 1895년 제1회 졸업생이 됐다. 곧 한성(서울)지방재판소 검사시보로 출발하여 판사,검사,마지막에는 대심원 판사까지 역임하였다. 이때 독립협회사건으로 구속됐던 이승만은 사형이 언도됐지만 7년으로 감형을 시킨 일도 있었으며,이상재도 역시 감옥에서 엄한 형을 내리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그를 무죄로 형을 확정하고 석방 시켰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을사늑약조약을 만나면서 조선 통감부 경성복심원 판사로 법관생활을 마감하였다. 
 
그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배경은 그의 부친이 먼저 서울 연동교회에 등록을 하자 아들 함태영도 함께 교회를 다니게 됐다. 1911년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1915년에는 목회에 뜻을 두고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재학 중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시무를 하였다. 이 무렵 1919년 남대문교회에 출석했던 이용설과 이갑성을 만나 암암리에 3ㆍ1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이승훈 장로가 앞장서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이 일을 추진하게 됐다. 그는 비록 33인중에 들어가지는 못하였지만 민족 대표 33인들과 똑같은 3년 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석방을 받은 후 마지막 신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제일교회 청빙을 받고 충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를 받은지 얼마 안된 함태영은 1923년 9월 8일에서 13일까지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모이는 총회에서 제12대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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