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5>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06일(월) 15:31

제9회 총회장 김익두 목사(1920-1921)
 
김익두(金益斗,1874-1950) 목사는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1900년에 안악교회에서 소안론(W. L. Swallon)선교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때 그의 부인이 안악 시장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었다. 이때 김익두는 술취한 상태에서 전도지를 받자마자 코를 풀었다. 이때 소안론 선교사 부인은 그 즉시 "오늘밤에 당신 코 썩습니다"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그 길로 안악교회에 출석하여 소안론 설교를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안악교회에 출석을 하게 됐다. 그 후 소안론은 김익두를 자신의 선교구역인 신천지역에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토록 하였다. 김익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인이 된 것을 늘 감사하면서 개인 전도에 힘을 쏟고 목사 된 후로는 부흥사로 전국을 누비면서 사경회를 인도하게 되면서 그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리어졌다.
 
1919년 가을에 서울 남대문교회의 청빙을 받고 시무를 하게 됐으며,1920년 10월 제9회 총회장으로 김익두 목사가 선임되었다. 김익두 목사의 총회장 사회로 회의 진행 중 독립운동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인사들을 위문하기로 결의를 하고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석방하도록 교섭키로 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부흥회에 나가 받았던 사례비는 (어려운 교회라면)그 교회에 전액 헌금을 하였으며,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무교회에 헌금을 하였다. 총회장으로 재임시 서울 승동교회에서 서울시 연합도사경회가 개최되었을 때는 6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오는 등 그의 명성은 더욱 널리 알리어졌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려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했던 일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강양욱 목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결국 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담하여 총회장도 역임하였다. 이 일로 김익두 목사는 말년에 큰 시련을 만나 결국은 그에 대한 이미지에 큰 손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군이 진주할 인민군과 함께 도피하지 않고 교회를 사수한다면서 신천교회에서 기도 중에 인민군의 총탄에 의해 처형을 당하였다.

 
제10회 총회장 이기풍 목사(1921-1922)
 
이기풍(李基豊,1865-1942)목사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길을 잘못 들어 평양의 대표적인 깡패가 됐다. 특별히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 거리를 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거침없이 돌을 던져 마포삼열의 이마에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후 이기풍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용서를 구하고 1902년부터 1907년까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1907년 9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에서는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하였다. 기독교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서 성안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8년 광주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음성이 나빠져 소리를 낼 수 없어 잠시 휴직계를 내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완쾌됐다. 그 후 1920년 2월 순천중앙교회에서 시무를 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21년 9월 10일에서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이는 제10회 총회에서 이대영 목사를 중국 선교사로,최흥종 목사를 연해주 선교사로 각각 파송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교회의 전도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각지방에 성경학교를 세우기로 결의를 하였으며,또 여기에 주일학교 공과는 만국주일학교 공과를 사용키로 채용하기로 결의도 하였다.
 
1924년에는 전남 고흥교회,1927년 자신이 개척하고 목회했던 제주 성내교회로 재부임하였다. 1931년에는 순천 벌교읍교회에서 시무를 하였으며,1936년에는 여수 앞 바다에 있는 우학리교회로 이동을 하고 그곳에 목회를 하다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결국 여수 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얼마동안 광주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심한 고문과 노환으로 더이상 구금시킬 수 없었던 일제는 곧 석방을 시키었다. 다시 우학리교회로 돌아가서 목회를 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설교 도중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기풍 목사를 영원히 기리고자 제주도와 우학리교회에서도 이기풍 선교사 기념관을 각각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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