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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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30일(월) 11:43
제5회 총회장 김선두 목사(1918-1919)
 
김선두(金善斗,1876-1949)목사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자연히 기독교를 접하면서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교사로 재직시 장대현교회에 출석하여 장로로 장립을 받으면서 교회를 봉사하던 중 1909년 장로로서 서문밧교회 목회를 하면서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1913년에 졸업(6회)을 하고 서문밧교회의 청빙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제7회 총회 시 사회를 맡았던 김선두 총회장은 각 교회에서 예배 시에 사용할 성경은 한글(언문)로 된 성경을 사용키로 결의를 하였다. 또한 한센씨 환자를 위해서 특별 헌금을 실시하는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선교 열의도 대단하였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 시 평양에서 3ㆍ1운동 독립만세를 직접 진두지휘를 하였으며,독립만세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이 일로 1919년 제8회 총회시 개회도 못하였다. 실은 선교사들은 그가 총회장이기 때문에 갖은 루트를 통하여 가석방이라도 얻어 총회를 개회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9월 초에 모이는 총회를 1개월 연장하여 10월 초에 개회를 하였지만 그 뜻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3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출감했던 김선두 목사는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교회를 비롯해서 함경북도 성진 옥정교회,만주 봉천교회를 시무하였다. 1938년에는 만주신학원을 설립하는 데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강요할때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직접 일본 교계 지도자와 기독교 정치인을 만나 그 뜻을 이루고자 단독으로 도일(渡日)하여 일본 교계 지도자는 물론 기독교 정계 지도자까지 만나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정치인들과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일제 고등계 형사들은 그가 귀국하자 부산에서 곧바로 체포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생을 해야 하는 아픔을 만나기도 하였다. 해방을 만났지만 그는 곧 월남하여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도 하였다.
 
제8회 총회장 마포삼열 선교사(1919-1920)
 
마포삼열(S. A. Moffett,1864-1939)선교사는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에서 출생하였다. 하노바대학과 대학원에서 과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다시 멕코믹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3년간의 신학을 수업 한 후 1888년 졸업을 하였다. 1889년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방문하고 자진해서 한국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자 1890년 1월 그토록 기도했던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그는 그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마포삼열은 6일간의 긴 시일을 거쳐서 평양에 도착을 하고 곧 평양 선교부를 설치하려고 준비 중에 있었는데 그를 도울만한 조사가 없던 차에 서상륜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던 마포삼열은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다는 말에 감동을 받고 한석진을 만나 함께 일을 하게 됐다. 바로 1893년 10월에 방을 하나 얻어 예배를 드림으로 평양 선교부가 개설되고 이어서 평양에 최초의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다.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가 출옥하지 못함으로 1개월이 지난 1919년 10월 4일에서 9일까지 모이는 제8회 총회는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기에 마포삼열 부회장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3ㆍ1운동으로 인하여 총회가 어려움을 만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 선교사인 마포삼열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3ㆍ1운동으로 인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인 증경 총회장 김선두,양전백 목사 등 여러 목사를 위문하기로 하였다. 그 외 일반신도와 미선학교 학생들이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냥 볼 수 없었던 총회에서는 개 교회에서 1주일간씩 특별기도회를 갖기로 결정도하였다.
 
마포삼열 총회장의 임기가 다 끝나자 다시 장로회신학교로 돌아가 신학생을 가르치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으며,그러나 불행하게도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마포삼열 선교사는 곧 이사회를 소집하여 폐교하기로 결의하고 문을 닫고 서울을 거쳐 자국으로 귀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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