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3)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1월 13일(금) 15:59

제5회 총회장 양전백 목사(1916-1917)

양전백(梁甸伯,1870-1933)목사는 평북 의주 구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당대에 유명한 유학자 이정로를 만나 경의학(經義學)을 수학하고 다시 한학을 연구하던 중 1892년 의주 출신 김관근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그와 함께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개최하는 사경회에 참석을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됐다. 양전백은 한학에서 깨닫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기독교에 접한 후에 1893년에 구성에 돌아와 작은 사랑채를 하나 얻어 그곳에서 한학을 가르치는 학당 겸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구성에 최초로 신시교회를 설립 하게 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나자 평양에서 마포삼열을 만나 그동안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자 그의 보고를 듣고 있던 마포삼열은 그의 당돌함에 놀라 곧 조사로 임명 하고 1896년부터는 위대모(N. C. Whittem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그의 선교구역인 평안북도 일대를 순회하다가 선천에 자리를 잡고 1897년에 선천읍교회 전도사로 담임하면서 신학교에 입학하여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1907년 6월에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을 하고 그 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 됐을 때에 최초의 7인 졸업생이 목사 안수를 받는 등 한국교회를 이끌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평북지방 대리회의 순회 목사가 되어 평안북도 초산,위원,강계,자성지역을 맡았으며,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즙안,통화,회인현까지 관장하였다. 그의 실력을 인정했던 독노회에서는 1909년 선천읍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6년 9월 제5회 총회에서 경상노회를 경남노회와 경북노회로 분립을,북평안노회에서 산서노회를 분립허락을 하였다. 이때 기일 선교사가 번역했던 장로교 예식서를 번역했던 것을 보고받고 곧 출간을 하기도 하였다. 양전백목사는 1919년 3ㆍ1 운동의 33인중에 한 사람으로 참여도 하였으며,이 일로 3년간의 감옥생활도 하였다. 이미 그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민족교회임을 보여준 몸으로 행동했던 목사였다.

 
제6회 총회장 한석진 목사(1917-1918)
 
한석진(韓錫晉, 1868-1939)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전통적인 유가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9세 때 한학을 배웠으며,유교의 형식적인 도덕관에 실증을 느끼고 불교로 개종을 하였으나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만주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돌아온 서상륜을 상면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였다. 1891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의주에 오자 이때 세례를 받고 마포삼열 선교사의 조사가 된 후 평양에서 마포삼열과 함께 장대현교회를 설립하는 등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석진은 1907년 6월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최초의 7인 졸업생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평안북도 선천,정주,박천 등 위대모 선교사와 함께 순회 전도목사가 됐다. 1908년 일본 유학생을 중심해서 설립됐던 일본 도쿄한인교회에 선교사로 1909년에 부임하여 3개월 간 그 교회를 이끌고 갔었다. 그 후 귀국하여 1910년 '예수교회보'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여 기초를 만들고 1911년 서울 안동교회의 청빙을 받고 부임하여 곧 벽돌로 2층 교회 건축을 시작하였다. 교회당을 완성하고 남녀를 구별하는 휘장을 철폐하는 등 선구자적인 목사가 됐다.
 
1917년 9월 제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됐던 한석진 목사는 총회에서 천주교회 교인과 결혼하는 일은 위태한 일이기 때문에 당회가 성혼이 되지 않도록 권면하는 일들을 결의하였으며,이때 불신자와 혼인한 사람에 대한 책벌과 해벌 기한은 당회에 맡겨 처리토록 하였다. 당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당사자는 물론 부모까지 책벌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 해벌해 주기로 하였다.
 
한석진 목사는 사상가나 학자는 아니었다. 항상 그의 마음속 깊이 '생명제일주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분란이 났을 때 기독교의 생명을 존중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목사측과 교인측을 설득하면서 3년 간 그 지루한 분쟁도 해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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