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2>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1월 06일(금) 15:38

제3회 총회장 배유지(1914-1915)
 
배유지(E. Bell,1868-1925)는 미국 센트럴대학과 켄터키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1895년 내한하였다. 1897년 3월에 자신의 조사인 변창연을 목포가 곧 개항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포로 파송을 하였다. 그는 목포에 양동교회를 설립하자 곧 바로 배유지 선교사 부부와 오원(Dr. C. C. Owen) 의료 선교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을 하였다. 오원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에 목포진료소를 설치하고 진료에 임하였다. 그러나 배유지는 함평,영광,장성,나주,광주지방이 그의 선교지역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901년 배유지의 부인과 두 딸을 남겨 놓고 내륙지방 선교여행을 떠났다. 마침 전주 선교부에 머물고 있을 때 날벼락 전보가 날아 왔다.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배유지는 목포에 도착했던 배유지는 부인의 시신은 싸늘하였으며,어린 두 자녀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서울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그는 굳 부인의 시신을 서울에 있는 양화진 양지 바른 헤론 선교사 곁에 안장하였다.
 
행정 구역에 따른 전남지방의 중심도시는 광주가 될 것을 알고 1904년 12월 광주에 선교부를 신설하고 오원과 함께 성탄절 아침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첫 광주교회(현,광주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1914년 9월 6일부터 9일까지 황해도 재령 남산현교회에서 제3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목사총대 62명(한국인 46,선교사 16)과 장로 46명이 출석하였다. 총회장에 배유지 선교사가 선임됐다. 중요결의사항 중에 당회 5개가 되면 목사,장로 각기 총대 1명을 파송키로 하였으며,또한 모든 선교사들에게는 총대 권을 주기로 하였다.  
 
제3회 총회장을 역임했던 배유지는 1908년에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광주제일교회의 성장으로 1922년에는 광주중앙교회,1924년에는 광주 양림교회를 각각 분립하는 등 선교업적을 남기었다. 그는 광주에서 삶을 마감하였으며,그의 시신은 광주 양림동산에 안장되었다. 
 
 
제4회 총회장 김필수(1915-1916)
 
김필수(1772-1948)목사는 경기도 안성 태생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독(獨) 선생을 초빙하여 한학을 터득하였으며,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고향을 떠나 새로운 나를 일으키 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상경하여 개화파인 박영효와의 친분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개화파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이 실패하자 잠시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을 갔었다. 귀국한 후 언더우두의 전도를 받고 새문안교회에 출석을 하다가 언더우드의 소개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이눌서(W. D. Reynolds)의 어학교사가 되어 전주에 머물면서 전주서문교회에 출석을 하고 그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다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고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1909년에 졸업을 하였다.
 
그 해 가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군산 개복교회와 구암교회의 두 교회의 청빙을 위임목사가 됐다. 제1회,2회,3회 총회장은 선교사들이 수장이 되어 총회를 이끌고 갔었다. 그러나 제4회 총회가 1915년 9월 4일부터 8일까지 전주 서문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이때 총대는 목사 60명,장로 60명 동수로 하였으며,선교사는 50명으로 모두 1백70명이 참가하여 배유지 총회장의 사회로 제4회 총회가 개회됐다. 제4회 총회에서는 교회 내에서는 의동생이니 수양동생을 금하도록 결의를 하였으며,특히 개 교회에서 장로를 선출 할 때는 2/3이상 득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헌법에 삽입토록 하였다.  이 총회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소아반(1-13세),유년반(14-20세),장년반(20세 이상)으로 분류 운영키로 결의를 하였다.
 
총회장 재임 중 그는 군산 개복교회와 구암교회를 사임하고 중 곧 상경하여 1915년 장ㆍ감 연합으로 '기독신보'를 창간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문서 선교에 힘을 쏟았다. 3ㆍ1 운동 당시에는 주필로 활약도 하였으며,말년에는 YMCA 운동에 힘을 쏟고 특별히 금주,금연,물산 장려운동들을 펴기도 하였다. 일제말엽에는 은둔의 생활을 하였지만 그렇게 대한독립을 소원했던 그 뜻을 이루었지만 이미 노쇠 현상을 만나 생을 마감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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