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1>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1월 02일(월) 15:47
1. 제1회 총회장 원두우 선교사(1912-1913)
 
1912년 9월 1일부터 4일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가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서 경기충청노회, 황해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함경노회, 경상노회, 전라노회 등 7개 노회에서 목사회원 96명(외국 목사 44, 조선 목사 52), 장로회원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총회를 창립하였다. 이때 초대 총회장으로 원두우((H. G. Underwood, 1859-1916)선교사가 선출되었다. 원두우가 총회장으로 선출되던 그 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키 위해서 미국에서 기금을 모금해 가지고 왔었으며, 그 기금으로 19만평 대지를 확보하고 1915년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건강을 지탱 할 수 없어서 귀국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평소에 고향보다는 한국에 자신의 시신을 묻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뜻이 유언대로 1999년 5월 20일 원두우 초대 총회장 유해가 양화진에 안치됨으로 원두우 가족들이 한자리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미 양화진에는 1949년 그의 자부, 1950년에는 그의 아들 원한경, 2004년 1월 19일에는 그의 손자 원일한도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1872년 그의 부모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에 정착을 하면서 미국 국적을 획득하였다. 뉴욕대학과 뉴브런스위크 개혁파 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신학과정을 마치고 1884년 그 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때마침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한국에 파송하려고 선교사를 모집 중에 있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원두우는 곧 필라델피아에 있는 선교부 본부에 찾아가서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로서는 한국을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지만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무조건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조선에 도착했던 원두우는 정동에 머물면서 1886년 6월 경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1887년 9월에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새문안교회가 출발하였다. 이를 개기로 경기도 양주군, 양평군, 김포군, 시흥군 지방을 다니면서 교회 설립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이미 소개했던 대로 원두우는 총각으로 선교사업을 하던 중 홀톤(L. S. Horton)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2. 제2회 총회장 왕길지(1913-1914)
 
왕길지(G. Engel, 1864-1939) 선교사는 1913년 9월 7일에서 11일까지 서울 안동교회에서 제2회 총회에서 총대 목사회원 89명(선교사 회원 52,한국인 목사 37), 장로 총대 40명 도합 129명이 제1대 총회장 원두우 목사의 사회로 개회예배가 시작됐다. 제2대 총회장인 왕길지 선교사는 1900년 10월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부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 하였다. 왕길지 선교사는 원래 1864년 10월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스위스로 유학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을, 그 후 영국에서 다시 에딘버러대학 신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1893년 인도 교육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활동을 하다가 가족이 호주로 이민을 떠나자 호주로 이주를 하였으며, 다시 한국 교육선교사로 나왔다.
 
왕길지 선교사는 일신여학교 교실을 센터로 정하고 매년 농한기를 만나면 부산뿐만 아니라 경남일대 농촌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사경회와 달(月)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당시는 철저하게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던 때라 남자는 남자 선교사들이 맡아서 교육을 시켰으며,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왕길지 선교사 부인이 1906년 과로와 함께 밀려오는 알 수 없는 병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부산에 있는 여자 선교사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혹시 자신에게 죽음이 대기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그 멀고 먼 마산을 지나 진주, 하동까지 다니면서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혼자 생활할 수 없었던 왕길지 선교사는 일시 귀국하여 한국 선교 상황을 보고하고 그곳에서 브라운(Miss A. Browon)을 만나 재혼하여 1907년 다시 부산으로 부인과 함께 부임하게 됐다. 왕길지 선교사는 어학에 재간이 있어서 헬라어, 히브리어 교수로 부산에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서 3개월 간 강의를 하면서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다. 제2회 총회에서 총대 중 언권 회원제도가 생겨나면서 중국 주재 선교사와 일본 주재 선교사에게 허락을 하였다. 왕길지 선교사는 193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호주 멜버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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