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국사의 자리에서 본 총회 1백년의 역사

<10> 한국사의 자리에서 본 총회 1백년의 역사

[ 교단 ] 격동의 한국 근ㆍ현대사와 함께한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 - 한일합병,3.1운동,8.15 해방,6.25전쟁,4.19혁명…87년 시민항쟁 등 영욕의 세월 동고동락

이진구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2월 20일(화) 15:20
 1백년의 역사 속에 빛과 그림자 교차한 한국교회
 과거 성찰 통해 어둠 몰아내고 빛으로 나아가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백년의 역사는 한국 근ㆍ현대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910년 한일합병에서 시작하여 3.1운동, 8.15해방과 미군정, 분단과 6.25전쟁, 제1공화국과 4.19혁명, 5.16군사쿠데타와 10.26사태, 5.18민주화항쟁과 87년 시민항쟁, 문민정부와 IMF사태를 거쳐 마침내 2011년 한미FTA의 체결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ㆍ현대 1백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격동의 역사이다. 한국교회는 한국 근ㆍ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 흐름을 바꾸면서 1백년의 역사를 빚어 왔다. 따라서 한국교회 1백년사는 한국 근ㆍ현대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하에서는 한국 근ㆍ현대사의 주요 타자로 등장한 일본 제국주의, 북한 공산정권, 군사독재, 서양문화, 그리고 가부장주의에 대해 한국교회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를 살피는 방식으로 한국교회 1백년의 궤적을 스케치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일제하의 선교사들은 정치불개입의 원칙하에 중립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친일'로 경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경우 '민족의 자유' 보다는 '신앙의 자유'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한국 교인들의 경우 '민족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의 신앙의 자유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민족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엮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하 한국교회는 '기독교 민족주의'의 논리로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말 신사참배가 강요되면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약화되는 대신 '동양적 기독교'라는 미명하에 '일본적 기독교'가 득세한 것은 한국교회사의 비극이다.
 
두 번째는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대결 속에서 한국교회가 어느 쪽을 선택하였는가 하는 물음이다. 해방 이전 한국교회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별하면서 사회주의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흐름이 미약하지만 존재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사회주의는 사실상 도태되었다. 특히 북한정권에 의한 교회탄압과 기독교인의 대규모 월남, 6.15전쟁의 발발은 남한교회의 반공주의를 극단화시켰고 이는 군사정권의 안보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에 내재한 무신론적 유물론에 대해서는 전투적 대결을 하였지만, 자본주의 문화에 숨어 있는 유물론의 위험은 간파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번영의 신학'에 기반한 성공주의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상품 자체를 숭배하는 자본주의적 물신숭배(fetishism)야말로, 동구 공산권 사회가 무너진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가장 경계해야할 유물론이 아닌가?
 
셋째는 군사정권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이다. 한국교회는 군사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종교라는 칭찬을 자주 받아 왔다. 실제로 1970-80년대 KNCC나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은 기독교 단체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에 크게 힘입은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한국교회 내부에는 권위주의의 바이러스가 만연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점차 확산되고 있는데 교회의 민주화는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세습'이니 '금권선거'니 '종교권력'이니 하는 용어의 범람은 한국교회의 권위주의와 비민주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와 미션스쿨은 민주주의의 실험실이었으며 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는 민주화운동의 기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유념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전통과 근대화의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구습타파, 우상타파, 미신타파의 이름하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해 왔다. 이러한 비판에는 긍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노름, 아편 복용, 축첩과 같은 악습을 타파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목욕물'과 함께 '아기'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다. 서양문명이 무조건 동양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렸는가 하면, 서양문명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을 그대로 모방하는 '신학적 사대주의'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토착화 신학'을 정죄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집단으로 존재하는 개신교가 덩치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서구신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한국문화와 접목할 수 있는 '한국적 신학'과 '한국적 기독교'의 생산을 위해 주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은 젠더 영역의 문제이다. 초기 한국교회가 사적 공간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공적 공간으로 불러내면서 여성해방의 기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자 목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교단이 더 많다. 여성에게 안수를 허용하는 경우에도 여목사 청빙은 매우 드물다. 이는 한국교회 안에 가부장적 문화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성들의 피와 땀으로 성장한 한국교회의 한 복판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주변화하는 가부장적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양성평등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진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초창기에 여성해방의 기수 역할을 했던 한국교회에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는 1백년의 역사를 통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만들어 왔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를 재성찰하면서 어둠의 영역을 없애고 빛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진구교수(호남신대,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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