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라인 카도쳐(작은 선물)

끌라인 카도쳐(작은 선물)

[ 교계 ] 성탄에 읽는 수필

조혜경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2월 15일(목) 15:16

필라델피아 리누드가든으로 이사한 것은 겨울이었다. 꽁꽁 추웠다가 녹은 땅에 이삿짐 차바퀴가 빠져 밤늦도록 이사가 지연되었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 한마디 쯤 열린 옆집 현관문 사이로 밖을 살피는 눈동자를 보았다. 우리 가족은 더 조용히 조심조심 이사를 마쳤다. 봄이 되도록 현관이 나란히 나 있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여름이 되자 계단에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앉아 바람을 쐬고 계셨다. 8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 한 뚱뚱한 몸피,남루한 원피스 밖으로 드러난 두 다리는 종아리와 발목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찐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어린 딸아이와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림=김지혜

마리아 할머니. 90년 동안 한 번도 필라델피아를 떠나 본 적이 없는,아들은 한국 전쟁에서,딸은 유방암으로 먼저 떠나보내고,아침에도 샌드위치,점심에도 샌드위치,저녁에도 샌드위치를 드시는,하지정맥류가 심해 두 다리에 쪽빛 혈관이 아이 손가락 두께로 도드라지는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도 잘 걸을 수 없는 할머니. 60이 넘은 사위가 이 주일에 한 번씩 들러 장보기와 청소를 도와준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장을 볼 때마다 옆집 문을 두드렸다.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할머니는 낡은 지갑에서 2불이나 3불을 꺼내주시며 바나나 3쪽,터어키햄 4쪽,하는 식으로 소량의 장보기를 부탁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께서 먼저 우리 현관문을 두드리셨다. 우리 집 유리창을 좀 닦아 줄 수 있니? 댓스 마이 플레줘!(기쁨으로 해드릴게요!) 남편과 내가 유리창을 닦고,냄새가 밴 침대 매트리스를 꺼내 햇볕에 말리고 진공청소기로 집안을 한 번 밀어드리고 나자 할머니는 2불을 딸아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 저녁 나는 할머니께 야채수프와 잡채를 해다 드렸다.
 
그렇게 1년 반을 살고 리누드가든을 떠나던 날,이삿짐을 싣는 내내 할머니는 현관문을 열어놓고 의자에 앉아계셨다. 차에 타기 전 인사를 하고 껴안자 드리자 할머니는 "리틀 기프트(작은 선물)"라며 종이봉투를 내미셨다. 아이보리색 슬립과 코티 분. 딸이 살아있을 때 선물로 주었던 것을 아껴두고 쓰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도 나도 두 손을 서로 잡고 웃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네덜란드 학교에서 우리 가족에게 제공한 집은 일반 주택 사이에 있는 한 채의 주택이었다. 집과 집이 붙어 있는 로우하우스였다. 도착한 첫날 저녁 누군가 벨을 눌렀다. 문을 열자 키가 큰 노부부가 꽃다발을 들고 웃으며 서계셨다. 옆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룹과 예니라고,이웃이 된 것을 환영한다고,무엇이든 도울 일이 있으면 아무 때나 자신의 집 벨을 누르라고 말씀하셨다.
 
네덜란드에서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잠자리에 들려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큰 상자가 문 밖에 놓여 있고 아무도 없었다. 예쁜 포장지를 풀어보니 상자 안에는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적힌 선물이 들어있었다. 예니할머니 글씨였다. 다음날 성탄 축하 인사를 드리며 감사하다고 말하자, "끌라인 까도쳐,헤?(작은 선물이지?)"하고 웃으셨다.
 
4년 반 동안 이웃으로 살면서 딸아이가 등굣길에 개에게 물렸을 때,남편이 갑자기 위궤양으로 배를 움켜쥐고 아파할 때,셋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아기용품을 준비할 때 등 나는 힘들거나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먼저 옆집 벨을 눌렀다. 또 할머니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나가 장을 보고 네덜란드식 강낭콩 수프 끓이는 법도 배우고,불고기,잡채,돼지고기볶음 같은 한국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할 때 할머니는 내게 남은 고추장과 한국밥솥을 선물로 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가끔 쌀로 밥을 지어 돼지고기볶음과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암스테르담 한국마켓에 나가 고추장,된장,간장을 사다가 밥솥과 함께 선물로 드리면서 말했다. "헤일 끌라인 카도쳐!(너무나 작은 선물예요!)"
 
필라델피아의 마리아 할머니는 우리가 떠난 지 2년 뒤 돌아가셨다. 92년 동안 한 번도 필라델피아를 떠나 여행해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결국 천국으로 첫 여행을 떠나셨다. 룹 할아버지는 심장이 안 좋아져 주택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셨다고 했다. 돌아보니 그분들은 우리 가족이 가장 춥고 배고팠던 유학시절 우리와 동행해주신 분들이다. 무엇이든 베풀며 '끌라인 카도쳐'라며 웃으셨지만 우리에겐 큰 선물이며 위로였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거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린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바비 킴이 노래를 잘부르는 것인지,곡이 좋은 것인지,가사가 심금을 울리는 것인지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슨 주책인가. 누가 볼까봐 후다닥 눈물을 훔쳤다
 
지난 일 년 어간 나는 언제나 나의 인생길에 동행자가 되어줄 줄 알았던 가족들을 잃었다. 그 존재만으로 내게 힘이 되어주셨던 아버지,6ㆍ25때 남편과 작별하고 유복자를 낳아 평생 홀로 키우셔 단단한 가정을 이루심으로 삶이 곧 본이셨던 작은 어머니,예수님을 영접한 후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주기도문을 외우고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해주셨던 시어머니. 그리고 멀리 계신 예니,룹,마리아. 지금도 그립기만 한 그분들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다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다시 흐를 것 같다.

그러나 이천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에 아주 작은 선물처럼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주님,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친히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시되 영원히,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까지도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그분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거대한 선물,부활과 영생의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울 수도 있지만 소망이 있다. 임마누엘!
 
조혜경 / 제7회 기독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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