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당시의 한국사적인 자료, 한국인의 기본권 완전 장악,종교조직만은 허용

1912년 당시의 한국사적인 자료, 한국인의 기본권 완전 장악,종교조직만은 허용

[ 총회1백주년 ] 헌병경찰제 강화로 기독교계 민족운동가 고문 협박, 토지조사 사업 및 일본화정책 강력 실시로 문화 말살

김승태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1월 28일(월) 18:01
한국이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한지 2년여 만인 1912년 9월 평양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의 장로교회는 독립적인 조직을 완성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이던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 등 한국인의 기본권을 완전히 부인하고 탄압하였지만,국제적인 이목 때문에 교회를 비롯한 공인된 종교조직만은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하에서 장로회 총회가 조직될 무렵 국내의 역사적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 이미 청일전쟁 이후 대만에 대만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지로 경영하던 일제는 그 경험을 살려,그 해 10월 한국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통감부 때 도입한 헌병경찰제를 더욱 강화하고,전국에 분산 배치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헌병경찰제는 군사치안을 담당하던 헌병에게 일반 민간 치안까지 겸임하게 한 것으로, 러일전쟁 이래 국권회복을 위해 일어난 의병을 상대로 일종의 정복전쟁을 벌이던 일본군 헌병에게 식민지 치안을 맡게 한 것이었다. 헌병경찰의 업무는 첩보 수집,의병 토벌,검사업무 대리,범죄의 즉결처분을 비롯하여 민사 쟁송 조정,산림감시,징세원조,위생,일본어 보급,법령보급, 도로개수 등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민중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업무를 효율적으로 실행하도록 뒷받침하기 위하여 1912년 3월 경찰범 처벌 규칙,조선민사령,조선형사령,조선태형령 등을 공포하였다. 이 가운데 태형은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하는 자 또는 벌금 또는 과료 1백원 이하에 처해야 하는 자로서 일정한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벌금을 낼 수 없는 자에게 형 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 1대로 환산하여 처형하는 악법이었다.
 
경찰범 처벌 규칙에 의해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생업이 없이 여러 곳을 배회하는 자,걸식하거나 걸식하게 하는 자,경찰관서의 특별지시나 명령을 위반하는 자,출입이 금지된 장소에 함부로 출입하는 자 등에 대해서도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헌병경찰은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처벌할 수 있었다. 이 야만적인 형벌은 3ㆍ1운동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난으로 1920년 4월 폐기될 때까지 일제 경찰이 자의적으로 한국인들을 폭행했던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로 인한 수많은 사망자ㆍ불구자들이 나왔다.
 
1911년 초부터 황해도 안악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하고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강요하여 안명근,이승길,김홍량,김구 등 16명에게 강도 및 내란미수죄 등을 적용하여 5~15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안악사건을 조작한 것도 헌병경찰이었다. 헌병경찰은 이 사건에 이어서 기독교계 민족운동가들을 일소할 계획으로 1911년 10월 중순부터 선천ㆍ평양ㆍ서울의 기독교계 학생,교사 등 7백여명을 구속하여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사건을 날조하여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혐의로 그 가운데 1백23명을 경성지방법원에 기소하여 1912년 6월 28일 재판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이 사건에 매큔,샤록스,마펫,노블 등 19명의 선교사까지 연루시켜 한국 교회에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위축시키고자 하였지만,국제여론의 압력으로 선교사들까지 구속ㆍ기소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의 1심 판결은 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직후인 1912년 9월 28일에 나왔는데, 재판 과정을 통해 아무런 물증이 없는 허위조작 사건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를 비롯한 1백5명에게 징역 10년에서 5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13년 3월 20일 2심 판결에서는 국제적인 비판 여론에 밀려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 6명에게만 징역 6년에서 5년에 이르는 형을 선고하였다가 이들도 1915년 2월 전원 일황의 특사로 사면 석방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에 가장 역점을 두어 추진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1912년 8월 토지조사령 및 시행규칙 공포로 본격화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1918년 11월에 완료된 이 사업은 종래 한국의 전근대적인 토지소유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소유권을 확정하여 이를 등기제도로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실제로는 농민들에게 전통적인 토지 경작권을 박탈하여 친일적 지주에게 소유권을 인정해 주거나,미신고 토지와 광범위한 국유지를 총독부에 귀속시켜 이를 동양척식식회사나 일본인 지주에게 불하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업으로 경작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떠나 국외로 이주하도록 내몰렸다.
 
문화적으로도 조선총독부는 경찰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일본어와 일본 풍습을 강요함으로써 동화(일본화)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였다. 특히 식민지 교육은 동화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교육의 목적을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의 육성"에 두고 교과서들을 개정하여 일본어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1911년 10월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민족적 교육을 시키던 사립학교들을 폐쇄시키거나 엄격히 규제하였다.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서도 일본인 교사를 강제로 채용하도록 하고 총독부 발행 교과서만 사용하게 하는 등 간섭을 하다가 마침내 1915년 3월에는 사립학교령을 개악하여 교사는 일본어에 통달해야 하고,규칙에 규정한 이외의 교과과정을 부가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하였다. 1912년 1월에는 조선총독이 일왕의 '교육에 관한 칙어'를 총독부 훈령으로 다시 공포하여 식민지 교육을 독려했다. 그리고 관공립 학교에서는 이 무렵부터 동방요배와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일상 생활에서 화폐나 연호도 일본 것을 쓰게 하고, 1912년 1월부터는 한국의 표준시도 일본 도쿄를 표준으로 하여 오전 11시 30분을 정오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12년 7월 30일 메이지 일왕이 사망하자,조선총독부는 각지에 요배소를 설치하여 동방요배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고,학생들을 동원하여 이런 의식에 참여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지도자들은 체포, 구금되거나 국외로 망명하거나 잠적하여 국내에는 민중을 지도할 지도력이 없었으며,많은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참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1919년 3ㆍ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이 종교계의 인물이었던 것은 이런 상황의 결과였다.
 

김승태교수(세계선교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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