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창립 당시의 문헌적인 자료

총회창립 당시의 문헌적인 자료

[ 총회1백주년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여 년에 걸친 상회들을 계승하고 완성한 정치기구

황재범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1월 11일(금) 17:20
2012년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설립 1백주년이 되는 해로, 한국장로교회로서는 참으로 뜻 깊은 해이다. 따라서 총회설립 1백주년의 뜻을 높이 기리고자 1912년에 있었던 제1회 총회가 어떤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탄생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전 상회(上會)의 계승 및 완성으로서의 총회

1912년 9월 1일에 설립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갑자기 설립되었던 것이 아니라, 20여 년에 걸친 그 이전의 상회들, 즉 '선교사공의회'(1893-1900),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1901-06), 그리고 '독노회'(1907-11)를 계승하고 완성한 정치기구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독노회인데, 총회는 역사적인 독노회(1907년 9월 17일에 창립하여 5년간 한국장로교회 정치의 토대를 놓았던)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장로교회정치체제를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1912년 총회의 설립은 1884년 한국에서 서구장로교회의 선교가 시작된 지 28년, 독노회가 시작된 지 5년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일이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는 미국 동부에서 청교도들이 1630년대에 장로교회를 시작하여 1706년에 필라델피아 노회가 설립했고, 1789년에 총회가 결성돼 미국 노회가 총회로 발전함에 있어서는 83년이나 걸렸다.

2. 독노회의 중요성 및 총회설립의 역사적 맥락

총회는 어떤 새로운 기구가 아니라 그 이전 상회들, 특히 독노회를 계승하고 완성한 기구이다. 독노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를 탄생시켰던 것처럼 단순히 총회뿐만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의 존재근거를 제공하였다. 독노회는 한국에서 경쟁적으로 선교해오던 4개의 서구 장로교회(미국 북ㆍ남장로교회, 캐나다 및 호주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서구로부터 독립시켜 설립한 노회였다.

그 당시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독노회를 설립하지 못하고 4개의 장로교회로 분립했더라면,분파주의가 강한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의 암흑기에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1907년 창립 독노회는 나아가서 헌법(당시 '장정'이라고 불림)을 채택함으로써 한국장로교회가 이제 완전한 장로교회가 되게 해주었다. '대한장로교회신경'(12신조)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정치)을 내용으로 하는 이 헌법의 채택은 한민족의 역사 전체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헌법은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에서 채택되었던 사실상 최초의 대한민국헌법(이는 도산 안창호가 장로교회의 정치 및 헌법을 모델로 하여 초안했음)보다 12년이나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장로교회는 이미 1907년부터 전국의 개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의기관인 전국적인 독노회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하되,헌법에 따라 실행하는 한국 역사상 최초, 최대의 민주주의적 기관이 되었다. 이를 보다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1912년에 총회 및 노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또한 독노회 5회기 동안 서양 장로교회 선교사 30여 명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 목사 48명이 '장립'되어 한국인에 의한 리더십을 뿌리내렸다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1912년의 총회 설립은 독노회의 발전에 근거해 있어 이를 함께 기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3.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설립의 의의

역사적 맥락에서 총회 설립의 역사적 의의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한국장로교회의 완성(특히 개혁교회 3대 표지의 완성)이다. 장로교회는 교회의 3대 표지가 '말씀의 설교, 성례의 합법적 집행, 정치(치리)체제'라고 가르쳐 왔고, 서구 장로교회의 헌법과 관행에서도 역시 당회, 노회, 대회, 총회라는 정치(치리)체제가 있어야 참된 장로교회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므로 한국장로교회는 1901년부터 노회 및 총회의 설립을 준비했고, 이것이 독노회를 거쳐서 특별히 1912년 총회 설립을 기하여 한반도 전체에 7개 노회를 설립하고 장로교정치체제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둘째,헌법에 따르는 대의민주주의의 정착이다. 제1회 총회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 대의 회합'이었던 만큼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역(노회) 및 전국(총회) 단위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였으며 특히 헌법에 따라 실현하였다. 이것은 당시 민주주의 및 헌법의 개념도 제대로 서있지 않던 역사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거의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장로교회의 제도적 및 정치적 안정성 확보이다. 총회 설립의 준비기간인 독노회 기간(1907-1911)에는 을사늑약 및 고종의 폐위(1907)와 한국의 병합(1910) 등의 운명적인 사건들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역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이 때 교회는 민족의 한줄기 희망의 등불이 되어 발전해나갈 뿐만 아니라, 노회 및 총회를 통하여 지역적 및 전국적으로 연합적인 발전을 해나가 사실상 일제하에서 가장 안정성을 줄 수 있는 단체가 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보다 뿌리깊게 성장할 수 있었다.

넷째,세계화 의식의 고양이다. 창립총회는 아직 유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에 대한 의식이 강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서양장로교회들과 유대를 심화하고 일본교회 및 감리교회와 교류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외지선교를 통하여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총회는 독노회가 창립하면서 제주도에 이기풍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것처럼,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는데,이는 총회가 이미 세계화에 대한 비전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섯째,학교교육 및 도덕훈련의 강화이다. 총회는 한편으로는 '학무위원회'를 설치하여 성도들의 계속교육 및 교육기관의 설립을 독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란한 교인들 47명을 출교하는 등 교회의 치리를 엄격하게 하여 교인들의 도덕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이로써 한국장로교회는 개교회들이 열심을 내면서도,모두 합(노회와 총회)하여 보다 높은 선을 이루는 시너지 효과를 드러내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를 통하여 보다 더 건강해짐으로써, 개교회가 튼튼하게 발전해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국가건설 및 민주주의 문화의 정착에 있어서도 그 어떤 다른 단체보다 더 중요하게 공헌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1백년 동안 한국장로교회 총회는 그 나름대로 뛰어난 시너지 효과를 내어왔으나,노회와 총회의 기능이 과거에 비하여 너무나 미약해지고 있다. 앞으로 총회 2백주년을 준비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노회와 총회를 재정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황재범(계명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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