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적 제국주의' 택한 선교사들

'인도적 제국주의' 택한 선교사들

[ 교계 ] 한국기독교역사학회ㆍ기독교역사연구소, '105인 사건' 재조명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1년 11월 08일(화) 16:45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류대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김흥수)는 지난 5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올해로 1백주년을 맞이한 '105인 사건'을 재조명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105인 사건'과 선교사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의 동아시아 인식과 '105인 사건' △'105인 사건' 피의자들의 사건 이후 행적에 관한 소고 등 3가지 주제의 발제와 논찬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105인 사건' 이후 선교사들의 대응을 살펴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911년 10월 평북 선천의 기독교계 학교인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구속된 이후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등 선교사들을 서울로 보내 구속자들 면회하고 선교본부 총무 브라운에게 편지를 전하고 주미 일본대사관에 접촉하게 하는 등 선교사들의 노력이 소개됐으며, 특히 당시 한국 YMCA 총무였던 질레트, 회장 저다인 선교사가 작성한 사건 보고서와 일본 YMCA 선교사 피셔가 작성한 편지의 내용이 상충돼 한국선교부와 일본선교부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두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성전교수(일본 게이센여학원대학 대학원 인문학연구과)는 '105인 사건' 이후 당시 북장로회 선교본부의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긴박한 극단에서 선교부가 취한 방책은 '정치불개입'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언론보다 늦게 사건에 대응하는 등 진실 규명 보다는 구명운동, 선교의 계속 가능성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표현에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인도적 제국주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제국주의 시대는 여러가지 복잡하게 중첩된 권력관계 속에서 선교사업 자체도 얽혀있다"면서 '105인 사건'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진행된 선교부 간의 문화교류, 신사참배 문제 등을 주제로 하는 연구에 있어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 입체적인 역사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논찬에 나선 안교성교수(장신대)는 "여전히 105인 사건을 종합적으로 규명하는 연구의 필요성이 남아있다"고 전제하면서 "105인 사건은 제국주의라는 당시의 가장 큰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을 때 정치적으로, 선교적으로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선교에 있어서 컨텍스트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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