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철권 통치자,고향의 하수구에서 최후를 맞다

42년 철권 통치자,고향의 하수구에서 최후를 맞다

[ 이강근의 중동이야기 ] 5. 리비아 카다피의 몰락

이강근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0월 31일(월) 16:55
   
지난 10월20일 반정부군과 내전 8개월 만에 전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가 생포된 직후 사망했다. 그의 체포 순간 외친 첫 마디는 "쏘지마"였다고 한다. 42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리비아를 통치해온 아프리카의 왕중의 왕 독재자치고는 비참했다. 이로써 튀지니아에서 발발한 자스민혁명 이후 벌써 3명이나 권좌에서 내려왔다.

최근 카다피의 사망소식에 때 아닌 그의 젊은시절 사진이 화제다. 42년전 카다피가 대위가 28세의 나이로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때만 해도 그는 젊고 스마트한 리비아의 영웅이었다. 그는 리비아의 석유를 갈취해가는 서방의 석유회사들에게 그간 갈취해간 이익을 내놓지 않으면 모든 석유채굴을 중단하겠다고 엄포했다. "우리는 5천년 동안 석유 없이 살았다. 몇 년간은 석유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협박에 모두를 굴복시켜 석유개발권을 리비아의 손에 넣었다. 리비아의 당당함은 다른 중동아프리카 산유국에도 용기를 불어 넣었다.

비록 베두윈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라고는 가본적이 없었지만 카다피였지만 그의 머리는 비상했다. 1970년 초에 리비아의 미래를 그린 자신만의 통치철학이 담긴 그의 저서 <그린북>은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할 수 없는 이론으로 억압받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유와 사회발전을 이룩하겠다는 대망이 담긴 책이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카다피는 한국을 리비아의 발전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한 놀라운 성공사례로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인적자원 개발로 기적을 만든 한국은 리비아가 따라가야 할 모델"이란 말을 자주 했다고한다. 2010년 6월 리비아 당국이 우리 대사관 직원의 정보 활동을 문제 삼아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급랭했었다. 그러나 곧 우리의 화해를 받아들이고 넉넉한 웃음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것도 아마도 한국에 대한 그의 호의 때문이었다. 그는 한때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일으켜서 사막을 푸른 초원으로 만들고, 오일달러를 투입해 리비아 전 국민의 무상의료 혜택을 받게 했으며, 똑똑한 젊은이에게는 유학의 기회를 제공하고, 결혼 시 수천만원의 지원금을 제공하는 등 나름데로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권력의 맛을 본 그는 시간이 갈수록 무서운 독재자로 변했갔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국가를 사유화했다. 카다피 사망직후 국가재건위원회가 밝힌 그의 추정 재산은 2백20조원이나 된다. 이 돈은 8개월 간 내전으로 파괴된 리비아를 재건하고도 남을 만하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카다피는 '중동의 미친개'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인물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추방하고 심지어 현지로 정보요원을 보내 암살을 일삼았다. 또 서방 기독교 세력에 대응해 이슬람 세력을 만들어 서방세계와 대결했고, 북한과 공조해 핵무기 개발하며 세계를 불안하게 했다. 카다피의 대표적인 국제적인 테러는 1986년 베를린의 한 나이트클럽을 폭탄테러와 1988년 승객 2백70여명을 태우고 뉴욕으로 향하던 항공기를 공중폭파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서방국가와 대립하던 카다피가 갑작스레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고 자국 내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며 서방세계와의 관계에서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흔드는 자국 내의 이슬람투쟁그룹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며 과격테러리스트 소탕에 적극적이었다. 이라크전쟁 당시에도 미국을 도우며 친서방전선을 구축했고, 이라크가 고용한 용병 중 20%가 리비아인인 점을 활용해 미국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나 2011년 1월 튀니지에서 발발한 자스민혁명이 리비아를 비껴가지 않았다. 당시 벵가지에서 인권변호사 연행에 반대하며 일어난 시위가 예상을 뒤엎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부족간의 갈등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카다피는 저격수까지 고용하며 시위대를 강경진압하면서 국제사회를 분노케 했고 서방의 세계의 개입을 자초했다. 이로서 2003년 이후 구축했던 서방세계와의 친분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8개월 만에 내전 끝에 결국 패배해 도망 중 자신의 고향의 한 하수구에 숨어 있다 체포된 것이다. 42년 철권 통치자로서 모든 권력과 국가 재산을 독점하고, 초호화의 사치 생활을 하면서 국민을 억압했던 독재자 카다피. 살아서는 왕이었지만 죽어서는 사막에 아무도 모르게 묻힐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이강근목사 / 예루살렘 히브리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ㆍ이스라엘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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