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말씀이 나에게 읽혀지기까지

변함없는 말씀이 나에게 읽혀지기까지

[ 기고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6월 08일(수) 14:00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중 그 착한 사람이 강도 만난 이웃을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부비(浮費)가 더 들면"이 "비용(extra expense)이 더 들면(눅10:35)"으로 번역된 내용이 나에게는 훨씬 이해가 쉬웠다.
 
"수금(囚禁)된 자"(시68:6, 69:33)는 "옥에 갇힌 자"로, 하나님이 다윗 왕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시고 "명철과 총명을 품부(稟賦)하시사"(대하2:12)는 "명철과 총명을 주시사"(endow)로 개역개정성경이 옮겼고, 다윗이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伸雪)하사"는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삼상25:39)로 번역되어 신원설치라는 한자로 된 사자성어까지 이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하였다.
 
바울이 말한 믿음이 온 후 우리는 "몽학선생 아래"있지 아니하도다를 "초등교사 아래"(갈3:24,25)로 되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에는 유아교육을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으로 윤리도덕을 가르치던 훈장이 담당한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필자는 보았다. 일제가 초등교육을 '황국신민'을 키운다고 "국민학교"제로 만들었던 제도를 고쳐 이제는 "초등학교"로 바로잡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말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에서 유래되어 자라나는 세대와 외국인은 어느 정도의 한자를 익혀야 이해될 정도다. 필자는 한자말의 선입견으로 바울의 전도 여행로를 읽다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한 곳인 밀레도(행20:17 Miletus)의 '도'를 섬(島)으로 알고 지중해 바닷길을 한 참 찾아본 일이 있으며, 어릴 때는 구약의 말라기(Malachi)가 마지막 책이라서 '말(末?)라기'로 붙여진 줄 잘못 생각하기도 하였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勝)하더라"는 "더 하더라"(민12:3)로, 시편 119편의 "주의 말씀이 ㅇㅇ보다 승(勝)하다"는 "금은보다 좋다"(72절), "스승보다 나으며"(99절), "노인보다 나으며"(100절)로 개정되어 우리의 노랫말로도 더 어울린다. 바울은 자신을 말에는 "부족하나" (고후11:6)를 개역판에는 "졸(拙)하다"로 되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이적에 쓰인 도시락을 표현할 때 한문 어순은 숫자인 다섯과 둘을 앞세워 '오병이어'라지만 우리 말 순서는 떡과 물고기를 먼저 넣지 '병오어이'라 하지 않으니 언어문화의 차이라고 본다.
 
영어권 표현은 "구원을 받았으니"(엡2:8)라는 말에 과거에 받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상태의 의미이다.
 
개역개정에서는 "구원 얻다"가 "구원 받다"로 "가라사대"는 "이르시되"로, "ㅇㅇ로 인(因)하여"는 "ㅇㅇ로 말미암아"로 나왔다.
 
인칭의 '저'가 개역개정판에서 '그'로 바뀌면서 주님을 낮게 부르지 않게 되어 기뻤다.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요3:16)가 "그를 믿는 자"로 바로 잡았으나 개역판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을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19:15)라고 소리 지르고, 지도자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막15:31)하면서 비하하는 지칭으로 번역된 것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 때 잠수함 끝부분을 '선미(船尾)'로 언론보도에 많이 나왔지만 갈릴리 바다에 광풍을 대작할 때 주님은 "'고물(stern)'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막4:38)로 뱃사람들의 정겨운 말을 성경은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과 글은 세계가 인정할 정도로 우수하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타자에도 편리하다. 수많은 중국사람 선교에는 한자문화에 가까운 한글이 크게 쓰일 것이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는 말씀은 불변하지만 바벨탑 혼란 후의 각 나라와 백성이 쓰는 말과 글로는 온전히 표현 못하는 한계를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만들고, 교회학교 공과를 제작하는 분들까지 잘 하도록 기도로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영적전투에도 간단명료하고 잘 이해되는 암호와 군령이 사용되면 승전은 그만큼 쉬울 것이다. 거울로 보는 때를 지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때까지 우리는 차선의 것에도 감사할 뿐이다.

이석근
은퇴장로ㆍ경주황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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