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바보'

예수 '바보'

[ 생명의양식(설교)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4월 06일(수) 13:13

▶본문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바보'. 바보란 '바라 보다'의 줄인 말입니다. 바보란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예수 바보, 바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사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사신 분입니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지금 치러야 할 대가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6)고 하신 말씀이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오늘의 고난 없이는 내일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일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오직 앞에 있는 기쁨만 바라봅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난을 감내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예수님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고 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목표가 있는 사람입니다. 목표를 향해 바보처럼 달려가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십자가란 흉악범을 못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로마의 경우 반란죄를 지은 자를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죽임을 당하는 기구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갈3:1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모욕하더라"(마27:40-44).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요, 바보입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이것은 하나뿐인 목숨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자기희생을 말합니다. 죄없는 그가 죄인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십니다. 바보는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느라 피곤하지만 바보는 자기 소신을 지키며 내면의 평화를 유지합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홀레스 닷지라는 자동차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저택에서 젊어서부터 근무해 온 나이 많은 문지기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몹시 게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닷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가! 내일부터 출근하지마!"라고 말하고선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퇴근해보니 노인은 여전히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오늘 아침 해고당했잖아!"라고 닷지가 말했지만 노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장님을 용서했거든요!" 노인은 해고 당한 직장에 날마다 나타났습니다. 해고 당한 경비원이 주인을 용서했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바보인데 그 바보가 최후의 승자입니다. 바보는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 행동합니다. 그 바보 속에 자기 긍정의 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루고자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당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바보 예수,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류철랑목사 / 부천동광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