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총회 섬겼던 기억 생생한데…

나란히 총회 섬겼던 기억 생생한데…

[ 기고 ] 故 신후식목사 추모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1월 16일(화) 19:18

 숭실대 평양신학 동회 동창으로 오직 우리 둘만 남아 있었는데, 이제 신 목사님 마저 부르심을 받았으니 나 혼자 남았습니다.
 신 목사님은 미국으로 수십년전에 가셔서 미국 전국으로 다니시면서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를 지켜주시는 일을 감당해 오셨습니다. 그가 일하시는 곳을 여러차례 방문해서 만난 일이 있는데 "신 목사님은 전국구의 목사시군요"라고 하면서 격려하고 한바탕 웃기도 했습니다. 근자에는 사모님을 먼저 떠나 보내시고 홀로 대학교수인 맏아드님과 같이 생활하셨는데, 전화로 대화한지도 오랜듯합니다.
"이제는 한국에 갈 수도 없네. 보행이 여상하지 못하네" 하시던 전화로 들려 주시던 말씀이 신 목사님의 마지막 육성이 됐습니다. 몇 달전 신 목사님의 막내 아들이 선교사로 일하시다가 한국에 잠시 들렸을 때에 목사님의 안부를 물으니 "누워 계시지만 전화는 받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이제는 음성도 못듣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일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제 아들 선주가 이메일로 전해 와서 알았습니다. 이제는 유일한 동창을 저 나라에 가서야 만나겠군요.

신 목사님은 저 보다는 5년 연상으로 만학을 하셨지요. 숭실대를 졸업하시고 계성고등학교 학교장으로 정년때까지 일하시다가 도미하여 미국 전역을 다니시며 교회를 많이 도우셨습니다. 많은 제자를 육성하셨기에 대구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신 목사님의 제자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일생 교육가로 많은 인재를 육성하신 공도 정말 큽니다.

교육뿐 아니라 목사로서 교회도 개척하여 목회도 하셨기에 그 교회에 가서 집회도 인도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신 목사님은 '근면 중후'한 성격으로 모범이 된 분입니다. 우리 학급에서는 고참이었지만 우정이 두터웠던 분이라 만날 때마다 느꼈던 살뜰했던 정이 생각할수록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또 총회장으로도 신 목사님 다음이 나의 차례였기에 나란히 총회를 섬겼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제 주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심을 쳐다보면서 며칠후에 만날 것을 기약합니다.

 따라 갈 동창  방지일  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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